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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

LEE Dong-Gook

축구 선수 이동국.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순간 그가 보여준 수많은 환희의 장면을 뒤로하고 2010 남아공월드컵이 먼저 떠올랐다. 축구 기자로 현장에서 취재했던 생애 첫 월드컵. 항구도시 포트 엘리자베스에서 열린 16강전에서 한국은 강호 우루과이를 맞아 선전했지만, 루이스 수아레스에 두 골을 얻어맞으며 1-2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후반 42분, 이동국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한다. 박지성이 우루과이 수비 사이로 오프사이드 함정을 완벽하게 뚫는 패스를 넣어주면서 그가 상대 골키퍼 무슬레라와 맞서게 된 것. 이동국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방’이 터져야 할 순간이었다. 프랑스 월드컵 이후 12년의 기다림. 조별리그 세 경기 대부분 시간을 벤치에 앉아 수백, 수천번 머릿속으로 골 장면을 상상했을 그였다.

하지만 후반부터 세차게 쏟아진 비로 잔디가 흠뻑 젖어 있었던 탓일까. 야속하게도 이동국이 날린 회심의 슛은 빗맞아 힘없이 굴러가고 말았다. 공은 골키퍼 옆구리를 스친 뒤 더욱 속도가 느려졌다. 떼굴떼굴 굴러서라도 공이 골라인을 넘어서기를 온 국민은 바랐지만, 수비수 디에고 루가노가 재빨리 이를 외곽으로 걷어냈다. 곧 종료 휘슬이 울렸고, 한국의 8강 진출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원정 응원을 온 팬들의 탄식 속에 취재진들도 아쉬운 마음을 안고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을 향했다. 한참을 기다렸을까.

이동국이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인터뷰를 해야 했지만, 취재진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이동국에게 남아공 월드컵이 어떤 의미인지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서 쏘아 올린 한 줄기 희망

이동국의 첫 월드컵은 1998년 프랑스 대회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1997년 12월 24일 조선일보는 포항제철고 3학년 이동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동국은 센터포워드의 기본 조건을 고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체격 조건(185cm)이 좋고 체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첫 번째 강점. 오른발 왼발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슛은 파워가 실려 있고, 드리블은 황선홍과 노상래의 장점을 합쳐놓은 듯 여유 있고, 부드럽다. 100m를 12초에 끊는 스피드와 제공권 장악도 발군이다.’

초고교급 스트라이커로 군림했던 그는 1998년 고향 팀인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다. 그리고 그해 열아홉 살에 프랑스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골 결정력을 해결해줄 차세대 공격수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한국은 프랑스 월드컵에서 9골을 실점하며 1무2패로 쓸쓸히 대회를 마감했지만, 이동국은 한국 축구에 한 줄기 빛을 선사했다. 그는 네덜란드와 조별리그 2차전에서 0-3으로 뒤진 후반 32분 교체로 월드컵 무대를 처음 밟았다. 한국은 두 골을 더 허용하며 0대5 참패를 당했지만, 이동국은 상대 골키퍼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중거리 슛을 쏘는 등 인상적인 플레이로 한국 팬들에게 조그만 위안을 안겼다.

2002 월드컵이 싫었던 남자

그렇게 시작한 이동국의 월드컵 커리어는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그는 그해 아시아 청소년선수권에서 5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과 결승전에서 터뜨린 환상적인 왼발 터닝 슛은 그를 ‘국민 스타’로 떠오르게 했다. 프로축구 경기장엔 이동국을 보러 온 ‘오빠 부대’가 장사진을 이뤘다. 이동국은 1998시즌 11골 2도움으로 K리그 신인왕의 영광을 안았다.

이동국은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무릎 부상을 안고도 6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독일 베르더 브레멘 유니폼을 입으며 유럽 진출의 꿈도 이뤘다. 하지만 분데스리가의 벽은 높았다. 그는 6개월 동안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2001년 여름 K리그로 돌아왔다.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동국은 2002 한·일월드컵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이 만족할만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동국을 월드컵 대표에 뽑지 않은 히딩크는 직접 그에게 “수비 가담 능력과 체력이 향상되지 않았고, 부상도 잦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혹사 논란이 나올 정도로 각종 연령별 대표팀을 오가며 조국을 위해 뛰었던 그였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 히딩크호가 ‘4강 신화’를 쓰는 한 달 동안 전 국민이 환희에 휩싸였을 때 이동국은 골방에 틀어박혀 쓸쓸히 소주로 속을 달래며 TV도 켜지 않고 지냈다.

이동국은 2003년 상무에 입대했다. 군 생활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그는 2003시즌 광주 상무에서 11골(6도움)을 터뜨리며 신인이었던 1998년 이후 5년 만에 K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달성했다. 다시 국가대표에 승선한 이동국은 2004년 중국 아시안컵에서 4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확인했다. 조 본프레레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한 이동국은 2004년 12월 독일과 친선 경기에서 ‘인생 골’을 만들어냈다. 1-1로 맞선 후반 26분 장기인 터닝 슛으로 세계적인 수문장 올리버 칸을 꼼짝 못하게 하며 골망을 흔들었다. 한국은 이동국의 활약에 힘입어 3대1로 승리하며 2년 전 월드컵 4강전 패배를 시원하게 설욕했다.

부상으로 날려버린 월드컵 꿈

독일 월드컵이 열린 2006년, 이동국의 컨디션은 최고조로 달해 있었다. 리그 4경기 연속 골을 넣으며 절정의 골 감각을 자랑하던 4월 5일 인천전. 호사다마였을까. 이동국은 달리던 중 뒤에서 날아온 공을 받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혼자 넘어졌다. 들것에 실려 나갈 때만 해도 그는 월드컵 출전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정밀 진단을 위해 독일로 날아갔고, 의사는 무릎을 보자마자 월드컵에서 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이었다. 이동국은 그날 밤 아내 몰래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술로 밤을 지새웠던 4년 전과 달리 그는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난 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월드컵이 열리는 독일에서 치료를 받던 이동국은 토고와 조별리그 1차전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2006년 말 인터뷰를 위해 만났던 이동국은 “독일 월드컵을 준비했던 시간이 축구 인생 중 가장 기량이 좋았던 때라 아쉬움은 남지만 좋은 약이 되었다”며 “다치고 나서 4개월 만에 공을 만졌을 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축구가 그리웠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2007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잉글랜드 미들즈브러 유니폼을 입은 것.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에 이은 네 번째 프리미어리거로 기대를 모았지만, 1년 반 동안 리그 23경기에 나서 한 번도 골망을 가르지 못했다. 2007 아시안컵에선 이운재, 김상식, 우성용과 함께 숙소를 무단 이탈해 술을 마신 것이 적발돼 1년간 대표팀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동국은 2008년 여름 조용히 K리그로 돌아와 성남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부진의 늪에선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리그 10경기에서 2골에 그친 그는 성남에서도 퇴출당했다. 축구 선수의 전성기라는 20대 후반, 이동국의 시련은 쉽사리 끝날 줄 몰랐다.

전북과 맞이한 서른의 터닝포인트

좀처럼 풀리지 않던 그의 축구 인생은 서른이 된 2009년 터닝포인트를 맞이한다. 최강희 감독의 부름을 받아 전북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영광보다는 아픔이 많았던 그의 커리어에 드디어 빛이 들기 시작했다. 최 감독은 개막전을 앞두고 이동국을 불러 “10경기 연속 무득점도 좋으니 마음 푹 놓고 뛰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세 살 된 쌍둥이 딸의 아빠 이동국은 감독의 믿음 속에 골을 몰아쳤다. 2009시즌 첫 골은 개막 후 두 번째 경기인 3월 15일 대구전에서 나왔다. 그 경기에서 두 골을 터뜨린 그는 5월 2일 제주전에선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는 7월 4일 광주 상무전에서 또 세 골을 몰아쳤다. 종전 리그 한 시즌 최다 골이 11골이었는데 여름에 이미 이를 달성한 것이다.

득점 행진은 끝날 줄 몰랐다. 이동국은 정규리그 마지막 두 경기에서 세 골을 몰아넣으며 전북의 1위를 이끌었다. 그리고 성남과 챔피언결정전. 이동국은 자신을 버렸던 성남을 맞아 2차전에서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넣으며 전북의 창단 후 첫 우승(1·2차전 합계 3대1)을 이끌었다. 이동국은 득점왕(22골)에 최우수선수상(MVP)까지 차지하며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렇게 2010년이 왔다. 다시 월드컵의 시간. 대회를 두 달 앞둔 이동국을 전북 클럽하우스에서 만났었다. 그는 “남아공월드컵에서 골을 넣는 상상을 자주 하곤 한다. 중거리슛일 때도, 헤딩일 때도 있다. 때론 오버헤드킥으로 결승골을 넣는 장면을 생각하곤 한다”며 웃었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그는 5월 에콰도르와 평가전에서 허벅지를 다쳤다. 그렇게 부상을 안고 3주간 실전 경험이 없는 채로 남아공을 밟았다. 그는 대회를 열흘쯤 앞두고 아버지에게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잘하겠습니다’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월드컵은 끝이 났지만…

다시 남아공월드컵 16강전 직후 믹스트존. 낙담한 표정의 이동국에게 겨우 누군가가 대회를 마친 소감을 물었다. 이동국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허무하다”고 했고, “이 순간을 위해 이렇게 땀을 흘렸나 싶다”고도 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월드컵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동국의 월드컵은 그렇게 끝이 났다.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네덜란드전의 15분,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의 9분, 16강전 우루과이전의 29분. 도합 53분. 추가시간까지 합해도 60분이 안 됐다. 이동국은 월드컵 본선에서 채 한 시간을 뛰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동국의 전성시대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이후 그는 K리그에서 찬란한 성과를 쌓고, 또 쌓았다.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전설이 된 그는 2023년 5월 ‘K리그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에 헌액됐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이동국은 서른부터 잔치였다.

도움왕 따내며 개인상 싹쓸이

2011시즌. 이동국의 위대한 여정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시점이다. 그는 이 시즌에 패스에 눈을 떴다. 한때 최전방에서 동료 패스를 기다리는 플레이 스타일로 “움직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가 풍부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경기를 읽는 눈이 좋아지며 도움 1위를 올랐다.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은 이제 골만 넣는 게 아니라 이기는 법을 아는 선수가 됐다”고 칭찬했다.

이동국의 전북은 이해에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결승에 올랐다. 알 사드(카타르)와 맞붙은 11월 5일 결승전엔 4만명이 넘는 관중이 전주월드컵경기장에 몰렸다. 알 사드가 4강 1차전에서 수원 삼성 선수들과 난투극을 벌이면서 한국 축구 팬의 공적이 됐기 때문. 하지만 전북은 아쉽게도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내줬다. 이동국은 ACL MVP와 득점왕(9골)을 차지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ACL 준우승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전북은 K리그 정상에 다시 섰다. 화끈한 공격축구로 ‘닥공(닥치고 공격)’이란 말을 유행시킨 전북은 챔피언결정전에서 울산을 맞아 1·2차전 합계 4대2로 승리하며 2년 만에 우승컵을 들었다. 2011시즌 생애 두 번째 MVP에 오른 이동국은 역대 최다인 어시스트 15개로 도움왕에도 올랐다. 이동국은 이 수상으로 K리그 최초로 MVP(2009·2011년)·신인상(1998년)·득점상(2009년)·도움상(2011년) 등 4가지 개인상을 석권하는 기록을 남겼다.

골문 열고 또 열어 신세계를 열다

전북 은사인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에 오르면서 2012년 이동국은 다시 태극 문양을 달았다. ‘쿠웨이트 킬러’란 별명답게 2월 쿠웨이트와 벌인 월드컵 3차 예선에선 결승골을 터뜨리며 한국을 최종예선으로 이끌었다.

이동국은 3월 3일 성남과 2012 K리그 개막전에서 두 골을 터뜨렸다. 그는 2009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우성용의 116골을 넘어 리그 통산 최다 골의 주인공이 됐다. 4월 8일 경남전에선 또 다른 대기록을 수립했다. 후반 17분 골망을 가르며 역대 최다인 168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것(121골 47도움). 신태용(현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이 보유한 종전 기록 167개(99골 68도움)를 넘어섰다.

이흥실 감독대행으로 시즌을 치른 전북은 2012년 K리그 우승컵을 서울에 내주며 2위에 머물렀다. 이동국의 리그 최종 성적은 26골 6도움. 서울의 데얀이 31골로 MVP와 득점왕을 싹쓸이했다. 이동국의 2013년은 아쉬움이 남았다. 5월 11일 전남전에서 도움을 기록하며 사상 최초로 공격포인트 200개(145골 55도움)를 달성한 그는 홍명보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새로 잡으며 대표팀에서 멀어졌다. 최강희 감독이 6월부터 다시 전북을 맡았다. 포항이 시즌 최종전에서 극적으로 울산을 제치고 우승한 가운데 이동국은 13골 2도움으로 시즌을 마쳤다. 전북의 최종 순위는 3위.

누구보다 행복한 대박이 아빠

2014시즌을 맞이한 이동국의 나이는 35세였다. 축구 선수로는 환갑이라는 얘기도 나왔지만, 그는 또 한 번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이동국은 8월 16일 포항전에서 전북 유니폼을 입고 100호 골을 뽑아내며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전북 구단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동국이 100골을 달성하자 서울 본사에 초대해 11인승 스타렉스 리무진을 선물했다. 국가대표 이동국에게도 ‘100’의 기쁨이 찾아왔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동국을 대표로 선발했고, 그는 9월 베네수엘라전에서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에 가입했다. 영욕의 대표팀 생활이었지만, 결국 ‘100’을 채웠다.

이동국의 전북은 11월 8일, 3경기를 남겨 놓고 3번째 K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그의 시즌 기록은 13골 6도움. 이동국은 그해 시상식에서도 ‘상복’이 터졌다. 2009년, 2011년에 이어 사상 최다인 세 번째 MVP를 수상했다. 인기상(팬타스틱 플레이어)도 세 번째였다. 베스트11(공격수 부문)은 2009, 2011, 2012년에 이어 네 번째 수상. 그렇게 3관왕에 올랐다.

2014년을 빛낸 인물로 이동국을 인터뷰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인터뷰였는데 독일 월드컵을 앞둔 부상 좌절, 남아공월드컵에 대한 설렘과 부담감이 지난 두 번의 주요 이슈였다면, 이번엔 그야말로 행복한 축구 선수와의 만남이었다. 그해 그는 다섯 아이의 아빠가 됐다. 2007년 쌍둥이 딸을 낳은 그는 2013년 또 한 번 쌍둥이 딸을 얻었고, 이해엔 막내아들인 ‘대박이’가 세상에 나왔다. 태명으로 지은 대박이처럼 2014년 대박이 난 이동국은 “다른 사람들이 샘을 낼까 봐 걱정될 만큼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이동국은 부상으로 2015 아시안컵엔 뛰지 못했다. 어쩌면 국가대표로서 마지막 임팩트를 보여줄 수 있는 대회였지만, 그는 아쉬워하기보다는 ACL 우승을 통해 아시아를 정복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5시즌엔 초반부터 전북의 독주가 이어졌다. 4월 18일 제주전에서 1대0으로 승리하며 K리그 역대 최다 연속 무패 기록(22경기·17승5무)을 달성했다. 이동국은 8월 12일 부산전에 나서며 개인 통산 400번째 출전 기록을 세웠다. 전북은 11월 8일 제주를 1대0으로 꺾고 남은 두 경기에 상관없이 2연속 우승을 이루며 네 번째 정상에 올랐다. 13골 5도움으로 전북 우승을 이끈 이동국은 2015년 시상식에서도 MVP와 베스트11, 인기상을 휩쓸었다. 다섯 자녀와 함께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대박이 아빠’로 인기를 얻은 그는 “다섯 아이의 슈퍼맨이 되겠다”고 했다.

ACL 우승으로 마지막 퍼즐을 맞추다

2년 연속 K리그 정상에 서며 확실한 ‘1강’으로 자리매김한 전북의 2016시즌 목표는 아시아 제패였다. 이동국은 3월 15일 빈즈엉(베트남)전에서 논스톱 슛으로 골망을 가르며 ACL 사상 첫 개인통산 30골을 기록했다. K리그 3연속 우승이 무난해 보였지만, 팬들에게 큰 실망을 안긴 사건이 터졌다. 전북 소속 스카우트가 심판을 매수한 사실이 드러나며 전북은 ‘승점 9 삭감’이란 징계를 받았다. 전북은 10월 15일 제주에 시즌 첫 패를 당할 때까지 33경기 무패 행진(18승15무)을 내달렸지만, 승점이 깎이며 서울에 승점 3 차로 우승을 내줬다.

하지만 전북엔 ACL이 남아 있었다. 이동국은 알 아인(UAE)과 결승 1차전에서 0-1로 뒤진 상황에서 후반 20분 교체로 들어가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후반 25분 레오나르도에게 동점골을 어시스트한 데 이어, 후반 32분엔 결정적인 크로스로 페널티킥을 끌어내는 데 관여했다. 레오나르도가 페널티킥을 성공하면서 전북은 2대1로 역전승했다. 11월 26일 UAE에서 열린 결승 2차전. 전반 30분 이재성의 코너킥 당시 이동국이 상대 수비를 끌어내며 공간을 만들었고, 이를 비집고 들어간 한교원이 발리슛으로 골망을 갈랐다. 전북은 1대1로 비겼고, 1·2차전 합계 3대2로 정상에 올랐다.

드디어 이동국이 아시아 정상을 제대로 밟는 순간이었다. 우승 후 눈물을 흘린 그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며 “언젠가부터 나에겐 월드컵에 다시 나가는 것보다 ACL 우승이 더 중요한 목표가 됐다. 마지막 남은 퍼즐을 맞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K리그 12골, ACL 5골로 2016시즌을 마쳤다.

‘전북 왕조’ 이끈 베테랑 골잡이

2017시즌, 38세 이동국은 어느덧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할 때가 잦아졌다. 그래도 번뜩이는 결정력을 보였던 그를 신태용 감독이 대표팀 명단에 다시 올렸다. 9월 5일 우즈베키스탄과 벌인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이동국은 후반 33분 이근호 대신 그라운드로 들어갔다. 결국 승부는 0대0으로 마무리됐고, 한국은 천신만고 끝에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그 경기가 바로 이동국의 105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가 됐다. 신태용 감독은 10월 대표팀 명단에 이동국을 제외하며 “이젠 K리그 영웅을 아름답게 보내줘야 할 때”라고 했다.

이동국은 9월 17일 포항전에서 1골 2도움으로 팀의 4대0 대승을 이끌며 리그 최초로 ‘70-70 클럽’에 가입했다. 10월 29일 제주전에선 후반 33분 헤더로 K리그 개인 통산 200번째 골을 터뜨렸다. 이날 전북은 리그 5번째 우승을 확정했다.

그는 1년 재계약하며 2018시즌에도 전북 유니폼을 입었다. 전북은 독주했다. 10월 7일 이동국의 페널티킥으로 울산과 2대2로 비긴 전북은 무려 6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통산 6번째 우승을 확정했다.

이동국은 11월 10일 제주전에서 필드플레이어 역대 최다 출장 기록(502경기)도 세웠다. 종전 기록은 김기동(현 포항 감독)의 501경기였다. 2019시즌을 앞두고 이동국은 다시 전북과 1년 재계약하며 40대에도 K리그 무대를 누비게 됐다. 그는 10월 26일 또 하나의 전설을 썼다. 서울전에서 1골을 넣어 K리그 최초로 300공격포인트(223골 77도움)를 채운 것. 우승 레이스가 싱거웠던 2018년과 달리 2019시즌은 막판까지 뜨거운 선두 다툼이 벌어졌다. 이동국은 10월 26일 서울, 11월 3일 대구전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며 전북에 힘을 실었다. 결국 우승은 최종전에서 극적으로 갈렸다. 울산이 포항에 1대4로 대패했고, 전북이 강원을 1대0으로 물리치며 울산과 전북은 승점이 79로 같아졌다. K리그 규정상 승점이 같으면 다득점을 따지는데 전북(72골)이 울산(71골)에 한 골이 앞서 통산 7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사상 첫 4연패 축포와 함께 떠나다

2020시즌. 이동국은 또 그라운드를 밟으며 최고령 선수가 됐다. 그는 그렇게 1990년대와 2000년대, 2010년대에 이어 2020년대에도 K리그 무대를 누볐다. 코로나 사태로 5월 8일에야 열린 개막전에서 이동국은 수원을 맞아 0-0이던 후반 38분 헤더로 골망을 가르며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코로나로 전 세계 스포츠가 대부분 멈춘 상태에서 이동국의 골이 터지자 BBC가 속보로 “거의 두 달 만에 전하는 축구 골 소식”이라고 전했다.

이동국은 6월 6일 서울을 상대로 두 골, 13일 인천전에서도 한 골을 넣었다. 출전 4경기 만에 4골을 터뜨리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결국 인천전 골이 그의 마지막 K리그 득점이 됐다. 부상으로 두 달을 쉬는 등 고전하던 이동국은 10월 26일 “올 시즌을 끝으로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았던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했다”며 은퇴의 뜻을 밝혔다. 사흘 후 기자회견에선 “부상이 잦아지면서 몸이 아픈 것보다 정신이 나약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마무리는 더없이 좋았다. 전북은 11월 1일 대구와 최종 라운드에서 2대0으로 승리하며 통산 8번째 우승컵을 들었다. 성남FC(7회)를 제치고 역대 최다 우승팀이 된 동시에 최초의 4연속 우승도 달성했다. 이날 마지막 K리그 경기에 출전해 시즌 첫 풀타임을 소화한 이동국은 경기 후 다리를 쩔뚝일 정도로 사력을 다했다. 전반 20분엔 이동국의 등번호 20번을 기억하기 위해 팬들이 2분간 기립 박수를 보냈다. 아쉽게 골망을 흔들진 못했지만, 전북 팬들은 떠나는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어진 은퇴식에서 그의 등 번호는 구단 사상 첫 영구 결번이 됐다.

이동국은 1998년부터 2020년까지 23년간 K리그 548경기에 출전해 228골, 77도움을 올렸다. 역대 최다 골이자 최다 공격포인트 기록. 필드플레이어 최다 출장자인 그는 전북 유니폼을 입고 네 차례 리그 MVP로 뽑혔고, K리그 우승 8회와 ACL 우승 1회란 금자탑을 쌓았다. 이동국은 ACL 통산 득점에서도 37골로 데얀(42골)에 이어 역대 2위를 달린다. 국가대표로는 A매치에 통산 105번 출전해 33골을 넣었다. 그런 그에게 롱런 비결을 묻자 “멀리 보지 않고 바로 앞 한 경기만 바라보면서 생활하다 보니 내 나이를 잊어버렸다”며 “프로 선수라는 직업은 선후배를 떠나 경쟁이다.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장점을 만들면 프로에서 롱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리그는 끝났지만, 한 경기가 더 남아 있었다. 11월 8일 FA컵 결승 2차전. 전북은 울산을 2대1로 누르고 1·2차전 합계 3대2로 정상에 올랐다. 후반 44분 교체돼 5분간 그라운드를 밟은 이동국은 자신에게 없던 FA컵 우승 트로피마저 차지하며 길었던 선수 경력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골잡이 이동국에게 20여년의 프로 생활은 늘 팬들의 비판에 직면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이겨내고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월드컵 골 빼곤 다 가진 남자’라 불리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20년 넘게 욕을 먹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내가 욕을 먹은 이유는 ‘이동국이라면 저 정도는 넣어줘야지. 한 방이 있잖아’ 하는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욕을 많이 먹은 선수가 있을까 싶은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게 20년 이상 골을 넣어줄 거라 기대를 받은 공격수도 없었겠더라고요. 마지막까지 박수를 받고 떠난 만큼 저만큼 행복한 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민석(조선일보 기자)

전설을 말하다 레전드 K - 이동국편
(스카이스포츠 / 2023년 8월 25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