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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SHIN Tae-Yong

스스로의 표현대로 ‘난 놈’이다. 단언컨대 대한민국 프로축구 40년 역사를 통틀어 이 선수만큼 눈부신 기록을 보유한 이도, 별처럼 무수한 스토리를 보유한 이도 없다. 보통의 선수들이 평생 한번도 경험하기 힘든, 기적같은 순간이 그에겐 유독 많았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번쩍하고 나타나 기어이 승부를 바꿔놓는 선수, 미드필더임에도 최전방 골잡이보다 골을 더 잘 넣는 선수, 학창시절부터 프로까지 가는 팀마다 첫 우승 역사를 쓰고, 한번도 힘들다는 해트트릭을 2경기 연속 몰아치고, 다친 수문장 대신 기꺼이 골키퍼 장갑을 끼는가 하면, 100호골은 필드골로 넣겠다며 페널티킥 찬스를 끝끝내 마다한 ‘낭만 캡틴’…. 1990년~2000년대 K리그 역사를 논함에 있어 ‘신태용’이라는 이 유쾌한 이름 세 글자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2023년 프로축구 출범 40주년을 기념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신설한 ‘K리그 명예의 전당’ 3세대 헌액자, “K리그는 내 인생의 전부”라는 사나이 고백을 서슴지 않는 ‘난 놈’ 신태용(현 인도네시아대표팀 감독)을 향한 뜨거운 헌사다.

영덕 촌놈, '난 놈'의 시작

경북 영덕에서 3남3녀의 막내로 태어난 신태용은 영해초 3학년 때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어갔다. 지고는 못사는 승부욕으로 한두살 위 선배들을 넘어섰고, 수비수 4~5명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발군의 공격 재능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하지만 동서고금 영웅연대기가 으레 그러하듯 ‘난 놈’의 어린 시절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6살 터울의 형이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불과 3개월 만에 막내의 재능을 아꼈던 아버지마저 지병으로 별세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마저 잃지 않으려면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소년은 오직 축구에 몰입했다. 16세 이하(U-16) 대표팀에 발탁된 이후 매년 태극마크를 달았다.

신태용은 대구공고 진학 후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고, 고3 때 나선 17세 이하(U-17) 월드컵에서 2골을 몰아치며 주목받았다. ‘양대 명문’ 연세대, 고려대와는 인연이 없었지만 서울 유수 대학에서 좋은 조건의 스카우트 제안이 쏟아졌다. 하지만 신태용은 대구 영남대를 선택했다. 대구공고 동기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자타공인 ‘그라운드의 여우’지만 그라운드 밖 인생에선 여우처럼 약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 “콩 한쪽도 나눠먹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마음 아픈 일은 절대 해선 안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새겼다. 신태용의 어머니를 향한 마음은 절대적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건 불심깊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다. 살면서 어머니 말씀을 거스른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영남대를 졸업하던 1992년 프로행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포항제철 장학생으로 영남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며 이름을 날렸던 신태용은 포항행을 철석같이 믿었다. ‘신태용 포항행’이 스포츠지 1면까지 떴지만, 정작 드래프트에선 ‘걸출한 선배’ 홍명보에게 밀리고 말았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이 유럽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 안에서 신문기사를 보고 낙담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화 천마행이 결정된 후 고민이 깊었다. 무섭다고 소문난 ‘호랑이’ 박종환 감독 밑에서 축구할 일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오죽했으면 마산 사보이 호텔에서 진행중이던 동계훈련 현장에 어머니와 동행했다. 박 감독에게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운명이었을까. ‘거침없는 영건’ 신태용은 이내 박 감독이 누구보다 아끼는 애제자가 됐고 이후 2004년까지 무려 12시즌 동안 '일화 원클럽맨'으로 K리그의 빛나는 역사를 써내렸다.

기록의 사나이

1992~2004년까지 일화 천마, 천안 일화, 성남 일화 유니폼을 입고 401경기에 나서 99골 68도움을 기록한 자타공인 K리그 레전드.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전성기는 입단 때부터”였다. 스물두 살의 신예는 룸메이트였던 베테랑 선배 고정운과 환상의 호흡을 뽐내며 프로 무대에 폭풍적응했다. 첫 시즌인 1992년, 9골 5도움을 기록하며 팀 준우승과 함께 K리그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2년차 징크스도 없었다. 1993년에도 6골 7도움으로 일화의 창단 첫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994년, 1995년 잇달아 우승하며 리그 3연패 역사를 썼다. 신인답지 않은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최우수선수상(MVP) 자리를 팀 선배 이상윤(1993년), 고정운(1994년)에게 내준 후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신태용은 프로 4년차였던 1995년 통산 29골 20도움으로 20(골)-20(도움) 클럽에 가입했고, 시즌 종료 후 축구기자단 투표에서 '한솥밥 골키퍼' 사리체프와 경합 끝에 그토록 간절했던 첫 MVP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흥실(포항제철), 고정운(일화)에 이어 MVP, 신인상을 모두 받은 역대 세 번째 선수로 기록됐다. 일화의 3연패를 이끈 겁 없는 '영건'에게 기자단은 41표 중 31표의 몰표를 던졌다. 신태용은 “나의 가장 열렬한 팬이었으나 중 2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새벽마다 불공을 드리시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는 애틋한 수상 소감을 전했다.

1996년에도 그의 전성기는 계속됐다. ‘미친’ 골 감각은 2경기 연속 해트트릭 기록으로 이어졌다. 1996년 8월 18일 충남 보령 공설운동장에서 펼쳐진 울산과의 96년 후기리그 개막전에서 해트트릭으로 5대4 승리를 이끈 지 불과 4일 만인 8월 22일 포항전(4대2 승)에서 2연속 해트트릭 대기록을 작성했다. 1986년 10월 19일 선배 정해원이 유공, 한일은행을 상대로 2연속 해트트릭 기록한 후 10년 만에 나온 역대 두 번째 진기록. 강호 울산, 포항 수비진을 상대로 한 해트트릭이라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신태용 이후 27년간 이 기록을 다시 쓴 선수는 나오지 않았다. 신태용은 그해 총 21골로 내로라하는 스트라이커들을 모조리 제치고 리그 득점왕에 우뚝 섰다. 프로축구 40년사에 신인왕, 득점왕, MVP를 모두 휩쓴 선수는 신태용, 이동국, 정조국 단 3명뿐이다.

‘최고의 K리거’ 신태용의 기록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태용은 2001년 일화의 두 번째 리그 3연패와 함께 50-50클럽에 가입하며 6년 만에 생애 두 번째 MVP에 등극했다. 한국 나이 34세였던 2003년엔 K리그 최초로 60-60 기록을 달성했다. (60-60 고지를 밟은 K리거는 신태용, 에닝요, 이동국, 몰리나, 염기훈 등 단 5명뿐이다. 이동국, 염기훈은 70-70 클럽에 가입했다.) 2004년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선 K리그 최초의 통산 400경기 출장 대기록을 세웠다. 감독들이 이구동성 말하는 가장 좋은 선수는 기복이 없는 선수다. 신태용은 가장 오래, 가장 잘한 선수였다. 1992년 데뷔 시즌부터 2004년 은퇴하기 직전까지 그는 리그 최고의 미드필더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1992~1996년 5시즌 연속 K리그 베스트11, 2000~2003년 4시즌 연속 베스트11에 선정되며 선수로 뛴 13시즌 중 무려 9차례나 베스트11에 뽑혔다. 프로축구 40년 역사에서 누구도 깨지 못한 위대한 기록이다. ‘기록의 사나이’ 신태용 스스로 가장 아끼는 기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기록중 아직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 기록이니까. 기록은 깨지기 위해 있고, 후배들이 더 잘해주길 바라지만, 내 기록 중 안깨진 게 있다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며 미소지었다.

반전 승부사

‘성남 일화 7번’ 신태용의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그라운드의 여우’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중원에서 공격과 수비를 영리하게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였고, 전방에 볼을 뿌려주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골 냄새도 기가 막히게 맡는 승부사였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썼고, 프리킥, 코너킥 등 세트피스 키커를 전담할 만큼 킥의 순도도 높았다. 100m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 감각적인 패스와 드리블, 드넓은 시야, 축구 지능 등 멀티 공격수의 장점을 두루 갖췄다. 대표팀에선 윙어로도 뛰었지만 소속 팀에선 투톱에서 처진 스트라이커나 2선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주로 했다.

미드필더로서 K리거 최초로 60-60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던 비결을 직접 물었다. 신태용은 “어릴 때부터 ‘꾀돌이’처럼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다. 골 냄새를 잘 맡았다. 키가 작았지만(1m74cm) 헤딩골도 많았다. 타점 포인트를 잘 잡는 편이었다. 2선에서 단순히 볼 배급만 하는 게 아니라 ‘주고 빠져들어가는’ 움직임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상대 수비 공간이 비면서 골 찬스가 생겼다. 나는 늘 골 욕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골도 잘 넣고 도움도 잘하는 만능 선수라면 피할 수 없는 단골 질문. ‘골 넣을 때가 좋은가, 어시스트할 때가 좋은가.’ 신태용은 “도움도 좋지만 팬들 앞에서 골을 넣고 환호할 때의 짜릿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즉답했다. 신태용다운 솔직한 대답. 공격형 미드필더지만 경기 조율이나 패스 마스터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팀의 승리를 위해, 골을 넣기 위한 움직임을 한발 더 가져갔다. 이것이 공격형 미드필더가 전무후무한 리그 득점왕까지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신태용은 타고난 승부사였다. 큰 경기에 유독 강했고, 그가 속한 팀은 어김없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신태용은 태어날 때부터 용감했다”는 유명한 삼행시처럼 그는 도전에 몸사리지 않았다. 한번 하기로 마음먹은 일은 해내고야 마는 근성과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호연지기가 있었다. 17세 이하 월드컵 직후 중고축구선수권에서 대구공고에 창단 첫 우승컵을 안겼고, 영남대 시절 올림픽대표팀 휴가중 출전한 대통령배 축구대회 결승에선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다.

승부를 뒤집는 ‘게임 체인저’의 면모는 K리그 팬들 사이에 지금도 회자되는 명승부, 1995년 11월 11일 포항과의 챔피언결정 2차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태용 스스로 ‘인생 경기’로 꼽는 바로 그 경기다.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자, 신태용은 “그날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대표팀 소집 때 허리를 다쳐 돌아왔다. 챔피언결정 1차전은 아예 뛰지도 못했다. 2차전도 팀을 따라왔을 뿐 경기 전에 제대로 운동도 못했었다”고 돌아봤다. 하지만 그에겐 3연패 목표와 함께 절실한 MVP의 꿈이 있었다. 앞선 2번의 우승에서 선배들에게 MVP를 내준 터. 이번에 우승하지 못하면 MVP의 꿈도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전반에 포항 (황)선홍이형이 2골을 넣으면서 0-2로 밀렸다. 그 경기에 지면 MVP를 못 받는다 생각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포항 원정에서 선제골을 내준 후 이긴 적은 한번도 없었다. 박종환 감독님이 후반전을 앞두고 ‘뛰어볼래?’ 하셔서 ‘예. 해보겠습니다’고 했다. 정말 절실했다. 미친 듯이 달렸다.” 후반 교체투입된 신태용은 나홀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날아올랐다. 포항의 우승 결정전이 될 뻔한 이 경기에서 양팀은 3대3으로 비겼고, 결국 기세가 오른 일화가 3차전을 잡으며 꿈의 3연패를 달성했다. MVP는 당연히 신태용의 것이었다.

원클럽맨

신태용은 K리그에서 보기 드문 원클럽맨이다. 2005년 호주 퀸즐랜드 로어FC 이적 전까지 성남 일화에서만 뛰었다. 2009년 성남에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선수와 감독을 통틀어 총 6번의 K리그 우승, 2번의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정상, 2번의 FA컵 우승을 일궜다.

K리그 MVP에 2번이나 오른 최고의 선수가 프로 세계에서 원클럽맨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본인 의지도 있었겠지만 구단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한 결과다. 1998년 '30-30 클럽' 가입 직후 독일 분데스리가 한자 로스토크행이 성사 직전까지 갔었다. 신태용은 새 도전을 위해 독일로 날아갔고, 훈련장도 가고, 집도 구했다. 현지 언론들도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이적을 둘러싼 양 구단간 온도 차가 컸다. 독일 구단은 이적료 50만 마르크를 제시했고, 천안 일화 구단은 100만 마르크를 요구했다. 결국 협상은 무산됐다. 일화 구단은 리그 최고 연봉과 함께 K리거 최초의 출전수당을 제안하며 상심한 신태용을 달랬다. 신태용은 “수당까지 합치면 4대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 연봉을 찍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국가대표 에이스들이 J리그로 줄줄이 진출하던 시대, 2001년 리그 최고의 별, 신태용에게도 J리그의 제안이 있었다. “K리그 MVP는 J리그에 가지 않는다”는 명언은 이 무렵 나왔다. K리그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발언에 대한 후일담 역시 참으로 신태용답다. “J리그보다 성남 일화가 더 많은 연봉을 주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구단에서 잘 챙겨줬고 나에 대한 신뢰가 컸다. 고 문선명 총재님(성남 일화 구단주, 통일교 교주)이 절대적으로 믿어주셨다. J리그 오퍼가 왔는데 연봉이 생각보다 적었다. 그 돈을 받고, K리그 MVP가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유쾌한 이슈 메이커

신태용은 K리그 최고의 이슈 메이커이자 빼어난 스토리텔러다. 그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화수분처럼 끝도 없다. 인간 신태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표적인 스토리는 K리그 팬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통산 99골’ 뒷얘기다. 신태용은 1992년 4월 18일 포항전에서 프로 데뷔골을 터뜨린 후 2004년 8월 8일 인천전 헤딩골로 99호골을 기록했다. 이후 마지막 100호골은 필드골로 넣겠다고 팬들과 호기롭게 약속했다. 남은 기간동안 한 골쯤은 충분히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페널티킥 기회가 올 때마다 눈 질끈 감고 ‘의동생’ 김도훈에게 기꺼이 양보했다. “페널티킥은 계속 안 찰 것이다. 한번 약속을 했기 때문에 끝까지 해볼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해 10월 김도훈이 100호골을 먼저 넣었고, 결국 신태용은 마지막 한 골을 채우지 못한 채 통산 99골로 은퇴했다는 '웃픈(웃기고 슬픈)'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99골에 대해선 전혀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만약 최다골 기록 경신이었다면 미련이 남았겠지만, 120골 넣은 선수도 여럿 있고, 200골 넘게 넣은 선수(이동국 215골)도 있지 않나”라며 쿨하게 반문했다. “100골을 목표 삼긴 했지만 미드필더로서 99골이나 넣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신태용 스스로 인정한 ‘난 놈의 천운’이 또 작용한 것일까. 한국프로축구연맹에 따르면 당시 누락된 골 데이터를 찾아내, 신태용의 골 기록은 102골로 정정될 전망이다. “골 기록이 올라가면 당연히 좋지. 이러다 ‘70-70클럽’도 내가 최초로 기록되는 것 아닌가?”라며 싱긋 웃었다.

‘성남 캡틴’ 신태용이 코너킥 골을 넣고, 골키퍼로 골을 막은 스토리 역시 명불허전이다. 신태용의 K리그 통산 기록 99골 68도움 옆 ‘2실점’이 새겨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3년 7월 27일 대전 원정, 전반 신태용의 코너킥이 골망으로 빨려드는 진기명기 속에 성남은 3-0으로 앞섰지만 후반 교체카드 3장을 모두 소진한 상황에서 골키퍼 김해운이 부상으로 나가는 긴박한 상황을 맞았다. 신태용이 유니폼 위에 형광색 티셔츠를 입고 골키퍼 장갑을 꼈다. 상대의 파상 공세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2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3대2, 성남의 승리를 지켰다. “스토퍼(센터백)만 빼놓고 안해본 포지션이 없다”는 그의 말은 반박불가 ‘팩트’다.

뼛속까지 ‘팬 프랜들리’

신태용이 그 시절 보기 드문, 진정한 프로페셔널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팬, 미디어와의 남다른 소통 능력에 있다. 그에겐 사람의 마음을 끄는 유쾌하고 소탈한 매력이 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유머 감각과 진솔한 입담,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를 지녔다. 동료, 선수, 지도자, 팬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선다.

코너킥 상황, “태용이형, 왼발!”을 외치는 홈 팬을 위해 오른발 대신 왼발 크로스를 기꺼이 차올려주고, 수원 삼성전에선 코너킥 준비중 상대 팬이 던진 물통의 물을 원샷한 후 엄지를 치켜올리는 ‘반전 매너’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성남 주장 시절엔 인근 학교 체육 시간, 축구를 가르쳐주러 가자는 제안을 구단에 직접 하기도 했다. 그 시절 프로의 마인드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신태용은 “프로는 팬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전제한 후 “매년 브라질 등 남미 전지훈련을 가고, 우승뒤 미국, 유럽 투어를 가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팬들을 위해 뛰어야 한다는 의식이 빨리 깬 것같다”고 설명했다.

성남 일화 감독이 된 후에도 그의 팬 프렌들리는 계속됐다. 2009년 첫승 후 ‘올림픽 챔피언’ 심권호와 함께 쫄쫄이 레슬링복을 입고 ‘맥콜 샤워’ 공약을 완수했고, 벤치에서 팬이 선물한 머그잔을 사용하는 모습으로 친환경 이미지를 각인시키는가 하면, 퇴장 징계 후 관중석 ‘무전기 신공’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남이 승리하는 날이면 탄천운동장 앞 치킨집에선 신 감독이 팬들에게 치맥을 쏘는 ‘골든벨’ 현장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팬들 역시 선수, 감독으로 성남의 모든 역사를 쓴 ‘성남 원클럽맨’ 신태용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무한긍정의 힘

신은 모든 걸 주지 않는다. 엎치락뒤치락, 매순간이 경쟁인 피말리는 프로의 세계에서 그라고 힘든 순간이 왜 없었을까. K리그에서 가장 잘나가는 공격수 중 하나였지만, 국가대표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A매치 통산 23경기 3골을 기록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직전 대표팀에서 탈락했고, 2001년 K리그 두 번째 MVP에 선정되고도 2002년 한일월드컵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002년 직전 리그 MVP를 받고도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때는 솔직히 아쉬움이 컸다. 리그 MVP가 반드시 대표팀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전세계적으로도 자국리그 MVP가 월드컵에 가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며 당시의 서운함을 떠올렸다.

대표팀에서 탈락할 때마다 좌절했지만, 신태용은 무한긍정의 마인드로 시련을 털어냈다. “리그에서 더 잘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럴수록 더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넘어질 때마다 그를 일으켜세운 건 긍정의 힘이다. “나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좋은 면을 먼저 찾아내려 한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안에 절대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다. 얼른 깨고 밖으로 나온다. 멘탈 회복이 빠른 편”이라며 웃었다.

‘여우’ 신태용은 언뜻 가볍고 유쾌해 보이지만 실은 매경기 서너 수까지 미리 내다보고 치열하게 디테일을 준비하는 완벽주의자다. 그는 분명 함께 신나게 놀았는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얄미운 천재들을 닮았다. 그는 “남들 안볼 때 다해놓고 논다”고 했다. “선수 때부터 시합 가면 호텔 방에서 안나온다. 쉬면서 축구 보고, 상대 분석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모든 선수에 대한 1대1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축구 인생에서 한번도 일어나기 힘든 기적같은 일이 유독 많았다는 평가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천운을 타고난 것 같다. 다 조상님 덕”이라며 웃었다. “집안 막내인데도 한국에 있을 때 제사를 한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 선수 때도 제사가 있는 날이면 저녁 경기가 끝난 후 영덕으로 무조건 내려갔다. 어릴 때부터 나만의 믿음이다. 하늘이 나를 틀림없이 도와주신다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했다.

위대한 K리거의 네버엔딩스토리

2005년 은퇴를 선언하고 호주에서 지도자 수업을 하던 신태용은 2009년 성남 지휘봉을 잡았다. ‘형님 리더십’으로 2009년 리그 준우승, 2010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1년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17년 한국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 2016년 리우 올림픽,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대표팀을 이끌며 ‘팔색조’ 전술 능력을 보여줬다. 특히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 우승후보 독일을 상대로 2대0 승리를 꿰차며 ‘기적의 승부사’ 기질을 다시금 입증했다.

2019년 12월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에 부임한 후에도 ‘신태용 매직’은 진행중이다. 2020년 스즈키컵 준우승, 2023년 아시안컵 본선 진출에 이어 2023년 6월 ‘카타르월드컵 우승국’ 아르헨티나(0대2 패)를 상대로 선전하는 등 인도네시아 축구를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호평 속에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2023년 5월, K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신태용은 어엿한 K리거로 성장한 두 아들, 신재원(성남FC), 신재혁(안산 그리너스)과 시상대에 나란히 서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맞았다.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 아버지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느끼고 있다”는 두 아들의 헌사에 신 감독은 K리그를 향한 애정, 선배의 진심으로 화답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대표팀에서도 K리그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K리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나는 국가대표팀보다 K리그에서 이름을 알렸다. ‘성남 원클럽맨’이라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후배들도 K리그에 더 많은 자부심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K리그에서 모든 걸 다 이뤘다”는 불세출의 레전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신태용에게 K리그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나이 고백이 돌아왔다. “K리그는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준, 내 인생의 전부다. 내 전부를 쏟아도 아깝지 않은 모든 것이다.”

전영지(스포츠조선 기자)

전설을 말하다 레전드 K - 신태용편
(스카이스포츠 / 2023년 8월 18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