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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HONG Myung-Bo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K리그가 빚은 1세대 작품이다. K리그는 ‘수퍼리그’라는 명칭으로 1983년 5월 8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첫 발을 뗐다. 그곳에 소년 홍명보가 있었다. 서울 광희중 3학년 때였다. 볼보이를 하며 미래를 그렸다. K리그에서 뛰겠다는 꿈과 목표를 품었다. 9년 후인 1992년 그는 당당히 K리그 무대에 입성했다.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첫 시즌부터 홍명보는 특별했다. 신인으로는 최초로 최우수선수상(MVP)을 거머쥐며 K리그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31년이 흘렀다. 홍명보는 1990년대, 2세대의 간판으로 'K리그 명예의 전당'에 최초 헌액됐다.

K리거가 되기까지

세상은 과정이 아닌 환희만을 기억한다. 소년 홍명보는 고통, 눈물과 동거했다. 출발부터 힘겨웠다. 소년은 마냥 볼이 좋았다. 친구들과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바탕 뛰어논 뒤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학교에 축구부가 생겼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공부를 잘한데다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1년이란 긴 설득 시간이 필요했고 서울 광장초 5학년 때 본격적으로 볼을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이 발목을 잡았다. 그라운드보다 벤치에 앉아있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광희중 1학년 때는 연습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몸싸움을 하다 나가 떨어져 오른쪽 쇄골이 부러졌다. 담임선생님은 그 길로 부모님을 만났다. “축구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공부를 시키시지요.”

소년은 좌절하지 않았다. 꿈 속에서도 좋아하는 축구를 그만둘 수 없었다. 체력 대신 기본기 훈련에 매진했다. 볼 컨트롤, 패스와 같은 동료들을 활용하는 플레이에 눈을 떴고, 훗날 큰 자산이 됐다. 왜소한 체격에도 반전이 있었다. 키를 키우기 위해 우유에 밥을 말아 먹기도 했다. 그 심정은 처절했다. 크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동북고 1학년 때 170cm도 안 됐던 신장이 2학년 때 10cm 넘게 자랐다.

'영원한 리베로'의 탄생

홍명보는 초등학교 때는 측면 공격수, 중학교 때부터는 미드필더였다. 고등학교 2학때부터 체격 조건은 더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동북고 시절 16세 이하 대표로 잠깐 활약했을 뿐이다. 고려대 진학 후 변화가 생겼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다 3학년때 리베로로 임무가 바뀌었다. 날개를 달았다. 수비와 공격을 넘나드는 전천후 플레이로 대학 무대를 평정했다.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파격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은 오늘의 홍명보를 연 시발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홍명보가 월드컵 출전은 물론 태극마크를 달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학생 시절 눈물의 시간은 약이었다. 그는 준비돼 있었다. 같은 포지션 선배들의 부상도 ‘행운’이었다. 처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됐다. 21세의 막내 홍명보는 스위퍼라는 중책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능성을 인정받은 그는 조별리그 3경기를 풀타임 소화했다. 비록 3전 전패로 자신의 첫 월드컵은 막을 내렸지만 한국 축구에 홍명보라는 새로운 보물이 탄생했다. ‘김정남 이후 최고 수비수’, ‘국가대표 발탁 1년 만에 수비수 1인자 등극’ 등 숱한 찬사가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 K리그와의 첫 만남

세상이 달라졌다. 홍명보는 '최대어'였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제도는 선수 중심이 아니었다. K리그와의 첫 만남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홍명보는 자신이 원하는 팀에서 뛸 수 없는 드래프트제에 반발해 건국대의 황선홍과 함께 프로 진출을 포기했다. ‘적은 돈에 팔려갈 수 없다’는 오기도 있었다. 포항제철 실업팀에 입단했지만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상무에 입대했다. 6개월 복무기간(2대 독자)을 거쳐 1991년 말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유공이 홍명보를 선택했지만 3대1 트레이드로 원하는 포철 입단에 성공했다.

‘1년 지각 신인’은 첫 술부터 배불렀다. 한풀이라도 하듯 K리그를 빠르게 접수했다. K리그가 태동한 이후 프로 데뷔 첫 해에 홍명보만큼 각광받은 선수는 없었다. 1992년 첫 시즌 그는 37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마수걸이 골이 걸작이었다. 순도 만점이었다. 잘 나가던 포철은 5경기 연속 무승(3무2패)의 늪에 빠졌다. 1992년 11월 14일 상대는 현대였다. 패할 경우 우승 경쟁은 사실상 끝이었다. 홍명보가 흐름을 다시 돌려놓았다. 경기 종료 직전인 후반 43분이었다. 쇄도하던 그는 권형정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트래핑 한 뒤 넘어지면서 왼발 슛으로 연결했다. 그러나 볼이 발에 닿는 순간 아차 싶었다. 발등에 제대로 얹혀 벼락같이 날아가야 하는데 축구화 끝에 간신히 걸려 바로 앞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이길 운명이었다. 맥없이 툭 떨어진 볼이 데굴데굴 굴러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승골이었다. 현대를 1-0으로 이긴 포철은 이날 경기를 필두로 3연승을 내달리며 1988년 이후 4년 만의 K리그 정상에 올랐다.

신인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신인상이라는 그릇은 작았다. 더 큰 ‘훈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명보는 신인으로는 최초로 MVP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첫 해 K리그 역사를 단숨에 바꿔버린 것이다. 베스트11에도 선정됐다. 홍명보는 늘 그렇듯 모든 공을 동료들에게 돌렸다.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 ‘월드 스타’ 반열에

데뷔 시즌 정상에 선 홍명보는 당당히 K리그 2연패 도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축구의 시계는 국가대표팀에 맞춰져 있었다. 1993년은 이듬해 열리는 미국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열리는 해였다. 한 번 소집되면 몇 달간 팀을 떠나 있었다. K리그는 대표선수 차출이 최대 변수였다. 홍명보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대표선수였다. 1993년 K리그 12경기 출전해 1골, 1994년 17경기 출전해 4골-2도움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국가대표 차출이 쉴새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1993년에 리그컵 우승컵에는 입맞춤했다.

1994년은 홍명보에게는 잊지못할 한 해였다. 그는 미국 월드컵에서 역대 최고의 성적을 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스페인, 3차전에선 독일을 상대로 연달아 골망을 흔들며 유럽이 주목하는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로 발돋움했다. 2무1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홍명보는 한국 선수 최초로 월드컵에서 멀티 공격포인트(2골-1도움)를 기록하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개인랭킹에서 수비수로는 최고인 10위에 올라 ‘월드 스타’ 반열에 올랐다. 또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아시아를 빛낸 선수’로 홍명보를 선정하며 최우수 수비선수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포철은 홍명보의 대표 차출 공백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3위에 그쳤다.

그래도 홍명보는 최고의 화제를 몰고 다녔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도 맹활약한 그는 일본 J리그의 22억원 스카우트 제의 등을 뿌리치며 K리그에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최고의 인기스타상을 휩쓸었다. 베스트11에도 뽑혔다. “그동안 대표선수로 뛰어 개인적으로 상당한 명예를 얻었지만 소속팀에 대한 기여도는 낮아 늘 미안했다. 내년에는 국제대회 출전이 거의 없는만큼 팀 공헌도를 높여 우승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홍명보의 진심이었다.

한국 프로축구 사상 첫 억대 스타 탄생

미국 월드컵 이후 K리그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홍명보가 그 변화를 이끌었다. 1995년 그는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연봉 1억원을 받는 ‘억대 연봉 스타’로 이름을 올렸다. 프로야구에 밀렸던 축구의 자존심을 홍명보가 다소나마 살렸다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구단은 고민이 많았다. 1억원은 당시 2만1000여 포철 임직원 가운데 단연 최고 연봉이었다. 회장보다 많았다. 하지만 포철은 홍명보가 ‘한국 축구의 간판’이라는 점을 감안해 결단을 내렸다.

홍명보는 그 해 억대 스타에 걸맞은 성적을 K리그 팬들에게 선물했다. 5월 10일 동대문운동장이었다. 미국 월드컵 독일전의 25m 중거리포가 진화했다. 유공을 맞은 포철은 하프라인 부근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홍명보가 허를 찔렀다. 그는 러시아 외인 골키퍼 샤샤가 수비 지휘를 위해 앞으로 나온 틈을 타 45m짜리 장거리 캐넌 포를 작렬시켰다. 그의 발을 떠난 볼은 빨랫줄처럼 쭉 뻗어 날아가 오른쪽 골대를 스친 뒤 그대로 골망에 꽂혔다. 프로축구 사상 최장거리 득점이었다. 볼 속도는 최고 수준인 시속 100km로 추정됐고 팬들의 탄성도 쏟아졌다.

홍명보는 1995시즌 31경기에 출전해 1골-2도움을 기록했다. 포철은 후기리그에서 우승하며 챔피언결정전에 올랐지만 일화의 벽에 부딪혀 정상 등극에는 실패했다. 홍명보는 2년 연속 베스트11에 선정됐다.

프로 첫 해트트릭 그리고 J리그 진출

1996년 스위퍼 홍명보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되는 전술적 이동이 잦았다. 전매 특허인 중거리포도 불을 뿜었다. 8월 25일 진기록도 수립했다. 수비수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는 전북과의 원정경기에서 후반 9분 라데, 18분에는 황선홍의 어시스트를 받아 연속골을 터트렸다. 그리고 5분 뒤 페널티킥골로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자신의 K리그 처음이자 마지막 해트트릭이었다. 그 해 34경기에 출전한 홍명보는 7골-3도움으로 두 자릿수 공격포인트도 달성했다. 베스트11의 영예도 다시 안았다.

해외 팀들로부터 러브콜을 연달아 받던 홍명보는 1997년 첫 변화를 선택했다. 홍명보는 재계약을 하면서 연내 해외 진출을 보장받았다. J리그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포항은 4월 29일 “홍명보를 이적료 122만달러(약 11억원·이하 당시 환율), 연봉 9000만엔(약 6억4000만원)에 J리그 벨마레 히라쓰카로 이적시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적료 11억원은 당시로는 K리그 사상 최고액이다. 세금 20%를 일본 측에서 부담키로 해 실질적인 이적료는 13억2000만원이었다.

포항 고별전은 5월 14일 안방에서 열렸다. 관중석은 모처럼 팬들로 가득 찼다. “홍명보”를 연호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가 넘쳤고, 기립박수로 석별의 정을 나눴다. 꽃다발 속에 파묻힌 그는 “일본에 가서도 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열린 환송연에선 축구 후배들을 위해 써 달라며 장학금 5000만원을 쾌척해 화제가 됐다. 하지만 홍명보의 공백은 K리그에는 아픔이었다. 스타들의 해외 진출 러시로 프로축구 관중이 30% 이상 급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홍명보가 K리그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영혼은 항상 한국에, 다시 K리그로→월드컵 4강 기적

홍명보는 J리그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그는 1998년 12월 벨마레에서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다. 2000시즌을 앞두고는 1993년 출범한 J리그 최초의 외국인 주장에 선임됐다. 가시와도 그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중하위권 팀이었던 가시와는 2년 연속 3위를 차지했다. 2000년에는 가시와 창단 후 최초로 나비스코컵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늘 그랬듯 한국에 있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변함없이 출격한 그는 생애 4번째 월드컵을 앞두고 2001년 연말 K리그 복귀를 선언했다. 왼쪽 정강이 피로골절도 그의 귀국 시계를 앞당겼다. 홍명보는 일본에서 다섯 시즌을 보내며 J리그 114경기를 포함해 135경기에 출전해 12골을 터트렸다. 가시와는 그에게 지도자 자리까지 보장했지만 사양했다.

홍명보는 월드컵 해인 2002년 1월 포항의 크로아티아 전지훈련에서 재기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당시 월드컵 출전이 불투명할 정도로 부상에 대한 우려가 컸다. 그는 월드컵 개막을 3개월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끈 대표팀에 재승선해 센터백으로 다시 자리잡았다. 홍명보에게 이전 3차례의 월드컵은 항상 벽에 부딪히고 넘을 수 없는 큰 산이었다. “월드컵은 또 지는 경기를 하는 무대구나!”라는 아픔을 토로할 정도였다. 선수 인생의 황혼기인 33세에 만난 한일 월드컵은 달랐다. 주장 완장을 찬 그는 대한민국에 4강 신화를 선물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4강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홍명보는 아시아 선수로 최초,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타 대륙 출신으로 처음으로 브론즈볼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또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필두로 한일 월드컵까지 한국이 치른 16경기에 모두 선발 출전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은퇴의 시간, K리그와 마지막 이별

한반도가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의 환희로 용광로가 됐다. K리그가 그 물결을 이어받았다. 2002년 7월 13일 홍명보가 K리그 복귀전을 치렀다. 1997년 5월 14일 안양 LG전 이후 5년 2개월만이었다. 상대는 부산이었다. 포항전용구장의 수용인원을 훨씬 상회하는 2만8000여팬들이 몰렸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운 그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월드컵 이후 각종 행사로 포항에 합류한 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지만 노련미를 바탕으로 수비 라인을 이끌었다. 또 미드필드까지 진출해 날카로운 패스를 연결하며 ‘영원한 리베로’의 명성을 확인시켜줬다.

포항은 이날 부산을 2대1로 꺾고 시즌 첫 승을 신고했다. 홍명보는 100%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90분 풀타임을 소화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피로가 몰아쳤다. 가쁜 숨을 몰아 쉰 그는 “기념이 되는 경기에서 승리해 기쁘다. 개인적인 목표는 없고 팀이 지난 해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도록 돕는 게 유일한 목표”라고 말했다. K리거 홍명보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 동거는 길지 않았다. 홍명보는 2002시즌 19경기에 출전해 1도움을 기록했다. 1996년 이후 6년 만에 베스트11에도 이름이 올랐다. 하지만 다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LA 갤럭시 이적을 선언했다. 그는 그 해 11월 20일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단짝’ 황선홍과 함께 대표팀에서도 은퇴했다. 관중들은 우레같은 박수 갈채로 두 영웅을 격려했다. 둘은 경기뒤 동료들의 무동을 타고 운동장을 돌았고 관중들에게 큰절을 올려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1990년 2월 4일 노르웨이와의 친선경기를 통해 A매치에 데뷔한 홍명보는 136경기에 출전해 10골을 기록했다.

사흘 전인 17일에는 K리그 고별전이 열렸다. 포항은 1만2000장의 홍명보 고별 기념엽서를 배포했다. 경기 종료 후에는 동영상, 기념품 증정 등의 자리를 마련했다. ‘홍명보! 당신이 있는 곳에 우리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팬들의 플래카드가 그라운드를 수놓았다. “입단 11년째가 되는 포항은 제2의 고향이자 축구 인생의 고향으로 팬들의 사랑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포항의 팬으로 남겠다.” 무표정이 트레이드마크인 그의 눈시울도 마침내 붉어졌다. 156경기 출전, 14골-8도움, 홍명보의 K리그 역사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세계가 인정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는 LA 갤럭시에서 두 시즌 활약한 후 2004년에 25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LA 갤럭시에선 40경기에 출전했다. K리그와 J리그를 포함해 프로통산 331경기에 출전해 26골을 기록했다. ‘월드 스타’ 홍명보의 객관적인 평가는 세계의 눈에 있다. 월드컵과 세계 올스타 출전은 다반사였다.

2004년 세운 이정표는 꿈으로 남았다. 그는 FIFA가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현존하는 세계 100인의 축구 스타’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아시아에선 홍명보와 나카타 히데토시, 둘 뿐이었다. 지네딘 지단, 데이비드 베컴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런던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FIFA 창립 100주년 기념 자선경매와 인증서 수여식에 참석해 작고한 ‘축구황제’ 펠레로부터 인증서를 받았다.

홍명보는 2014년 AFC 창립 60주년을 맞아 AFC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헌액 대상자 10명 중 한국 출신으로는 유일했다. 그는 2013년 창단 40주년을 맞아 공개된 포항의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지도자의 길, 영욕의 세월

홍명보는 은퇴뒤 축구 행정가를 꿈꿨다. 운명은 달랐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콕 집어 홍 감독을 코치로 선임했다. 그는 2005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출사표는 홍명보다웠다.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K리그의 스타 탄생에 일조했다. 코치 생활을 끝내고 처음으로 감독에 오른 것은 40세 때인 2009년이었다. U-20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구자철(제주) 김영권(울산) 홍정호(전북) 김보경(수원) 등이 ‘씨앗’이었다. 그 해 이집트에서 열린 FIFA U-20 월드컵에서 18년 만의 8강 진출을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 바람은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이어졌다. 한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은 감독 홍명보가 빚은 작품이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숙명의 라이벌’ 일본을 꺾고 목에 건 메달이라 감동의 물결은 곱절이었다.

그러나 감독의 명예는 한 순간에 파괴될 수 있다. 그 또한 피할 수 없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1년 앞두고 소방수로 등장했다. 국가대표팀이 이미 본선 진출을 확정한 뒤였다. 짧은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결말은 아팠다.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그의 인생도 무참히 짓밟혔다.

‘야인 시간’은 꽤 길었다. 세상의 가혹한 눈초리에 한국 축구와도 거리를 뒀다. 1년 6개월뒤 그라운드로 돌아왔지만 그 무대는 중국이었다. 항저우 뤼청(그린타운) 사령탑을 맡은 그는 이듬해 5월까지 중국에서 생활했다. 딱히 반전도 없었다. 그렇게 홍 감독의 지도자 인생도 끝이 나는 듯 했다.

먼 길을 돌아 처음 품었던 꿈인 행정가로의 새 길이 열렸다. 홍 감독은 2017년 11월 17일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로 첫 출근했다. 직장 생활의 보람도 있었다.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파울루 벤투 감독 체제를 연착륙시키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

K리그 복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냐

그라운드에 대한 목마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는 늘 K리그가 있었다. 홍명보는 2020년 12월 K리그로 돌아왔다. 울산 현대의 사령탑에 올랐다. 18년 만의 재회였다. 홍명보는 여전히 K리그 40년사의 주인공이다. 2021년 첫 시즌은 ‘예고편’이었다. 판이 이미 짜여진 터라 뒤엎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준우승의 아쉬움을 삼켰다.

2022년은 그의 해였다. ‘10년 대운’은 ‘과학’이었다. 1992년 신인 선수 최초 K리그 MVP, 2002년 월드컵 4강,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선 동메달 신화에 이어 K리그의 지존이 됐다. 울산에 17년 만의 K리그1 우승을 선물했다. 홍명보는 조광래 최용수 김상식에 이어 역대 네 번째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K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최고의 지도자에게 수여하는 감독상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박경훈 최용수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K리그 MVP와 감독상을 모두 거머쥐는 인물로 기록됐다. 2023년에는 최단 기간 50승도 달성했다. 4월 25일 50승 고지를 밟았다. 최용수가 FC서울 사령탑 시절 이뤘던 800일만의 50승 기록을 14일 앞당겼다. 그의 신기록 행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홍명보에게도 늘 따뜻한 봄만 있었던 건 아니다. 환희와 눈물, 좌절, 재기, 희망이 오갔다. 54세의 홍명보는 또 하나의 꿈을 이뤘다. K리그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이다.

“나보다 훨씬 K리그에 공헌한 선수들이 많은데,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간 받았던 상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상이 아닌가 싶다. 매주 K리그 피치 위에 서 있다. 그 피치 위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많은 발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더 발전을 해야 한다. 그런 부분을 위해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많은 역할을 하겠다.”

K리그와 홍명보의 동행, 마침표는 없다.

김성원(스포츠조선 기자)

전설을 말하다 레전드 K - 홍명보편
(스카이스포츠 / 2023년 8월 11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