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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호

CHOI Soon-Ho

1991년 8월 10일. 1만8천여 명의 관중이 들어찬 포항 스틸야드에서는 포항제철과 현대의 경기가 한창이었다. 오후 6시 킥오프 때만 해도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어느새 어스름에 물들고 있었다. 스틸야드가 자랑하는 지붕의 조명이 불을 밝히자 환한 빛이 그라운드로 쏟아졌다. 홈 팬들의 기대와 달리 경기는 원정팀 현대가 주도하는 흐름이었다. 현대가 김현석과 송주석의 연속골로 승기를 굳힌 후반 35분 포철의 이회택 감독은 벤치 옆에서 몸을 풀고 있던 이기근에게 출전 신호를 보냈다. 그해 프로축구 득점 레이스를 질주하던 포항의 ‘해결사’가 나서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교체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울렸다. 베테랑 공격수 최순호가 터치라인을 힐끗 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이기근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주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무리했다. 이기근이 들어간 뒤에도 스코어는 달라지지 않았고, 경기는 그대로 종료됐다. 그라운드를 돌아보는 최순호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에게는 사흘 전 경기와 같은 시즌의 연장선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될 것만 같은 일상의 어느 하루였다. 그러나 사실은 평범한 날이 아니었다. 최순호가 프로 통산 100번째 경기를 소화한 날이었다. 국내 프로 무대에서 그가 마지막 경기를 뛴 날이기도 했다.

프로 축구 태동 알린 1세대 스타

프로 무대에 남긴 최순호의 기록은 언뜻 평범해 보인다. 1983년부터 1991년까지, 9년 동안 100경기에 출전해 23득점 19도움을 기록했다. 한 시즌 평균 10경기 남짓 소화한 셈이다. 시즌당 30경기 이상 꾸준히 소화하는 선수들이 많고 500경기 이상 출전 대기록을 작성하는 선수도 낯설지 않은 요즘이고 보면, 최순호의 기록은 초라해 보일 정도다. 비슷한 시기(1980년~1991년) 최순호의 대표팀 기록(95경기 30득점)과 비교해도 의아하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대표 경기가 프로 경기에 우선하던 시절이었다. 올림픽, 아시안컵, 월드컵 같은 큰 대회를 앞두고 대표팀은 장기 합숙 훈련을 실시했다. 아직 개발도상국이던 대한민국이 국제 무대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분야는 스포츠였다. 국가 차원에서 스포츠를 육성하던 시절이라 대표팀도 클럽처럼 운영됐다. 프로 선수들은 소속팀보다 대표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최순호가 “축구로 돈을 벌기 시작”한 때부터 그랬다. 청주상고 3학년이던 1979년 청소년(U-20) 대표팀에 발탁돼 곧바로 주전으로 뛴 그는 아직 10대이던 1980년 국가대표팀으로 월반하며 차세대 스타로 떠올랐다. 이런 기대주를 입도선매한 팀은 실업 강호 포항제철 축구단이었다. 포항제철은 1973년 창단 이래 이회택, 김호, 박수일, 이차만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유하며 화려한 위용을 자랑한 팀이었다. 1970년대 말 세대교체를 진행하면서도 이같은 기조는 유지됐다. 최순호는 포항 뿐 아니라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선봉에 선 이름이었다. 1979년 고 3이던 최순호와 계약을 맺은 포항제철은 1980년부터 그를 간판스타로 내세웠다. 정작 포항제철에서 최순호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해는 1981년인데, 1980년에는 아시안컵 참가로 대표팀에서 훨씬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아시안컵에서 최순호는 조별리그에서만 7골을 넣고 득점왕이 됐다(18세 최연소 득점왕).

최순호의 입지가 달라진 것은 임금 상승폭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선수단 임금 형태는 호봉제였다. 연차가 쌓인 만큼 경력을 인정해 임금이 올라가는 체계였다. 고졸 선수는 5-1호봉, 대졸 선수는 4-1호봉이 적용됐다. 최순호는 “첫 월급으로 받은 돈이 10만원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1979년 입단 당시 5-1호봉으로 책정된 최순호의 급여는 대표팀에서 활약하고 돌아온 1년 만에 4-1호봉으로 조정됐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시안컵 득점왕 이후 바야흐로 득점 감각에도 물이 올랐다. 포항제철로 복귀한 최순호는 1981년 팀의 실업축구연맹전 우승에 힘을 보탰다. 3월 17일 성무(공군축구단)와의 개막전부터 폭발했다. 2013년 발간된 ‘포항스틸러스 40년사’에서 당시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400여 명의 관중이 모인 서울 효창운동장에서는 포항 최순호의 원맨쇼가 이어졌다. 후반 20분 미드필드 오른쪽 진영에서 공격수 김만수가 패스해준 것을 문전에서 강력한 슛으로 연결했고, 성무의 골망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후반 35분에는 경기장 중앙에서 상대 진영까지 단독 드리블을 펼친 후 중거리 슛으로 득점에 성공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15분 사이에 최순호의 발끝에서 두 골이 터진 것이다. 포항은 최순호의 활약과 후반 10분 김경호의 선제골에 힘입어 3-0으로 성무를 제압했다.’

사서에서 언급한 슛과 드리블은 최순호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다. 185cm의 신장으로 뛰어난 피지컬을 가진 그는 장신공격수의 역할이 한정적이라는 고정 관념을 깬 선수였다. 100미터를 11초대에 주파하는 스피드와 제공권, 강한 슛 같은 운동 능력 외에 공간을 활용하는 드리블과 패스 등 센스와 유연함을 고루 갖춘 공격수였다. 그가 달리고 슛을 시도하는 움직임은 종종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특성은 시간을 지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보인다. 실업리그와 프로리그 초창기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득점에 치중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고, 1980년대 중반부터는 득점 기회를 만드는 미드필더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아직은 스트라이커로 강점이 두드러지던 1982년, 그는 포항제철의 실업축구연맹전 2연패에 다시 한번 힘을 보태는 것으로 가치를 입증했다.

프로 시대가 불러온 ‘연공서열의 해체’

1983년 프로축구 수퍼리그가 개막했다. 리그 차원의 과제는 ‘관중 동원’이었다. 리그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흥행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 키는 스타가 쥐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는 활약상으로 이미 스타였던 최순호는 프로 시대에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특급 스타였다.

최순호가 프로 시대로의 전환 무드를 체감한 사건은 연봉 계약이었다. 1983년 실업팀으로 수퍼리그에 참가했던 포항제철은 1984년 프로팀으로 본격 전환했다. 선수단은 ‘퇴사 후 재입사’라는 방식으로 기존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1983년 9월 최순호가 실업 선수 신분으로 받은 퇴직금은 200만원 남짓이었다. 임금 형태도 호봉제에서 연봉제로 바뀌었다. 프로 첫 계약 당시 최순호의 연봉액은 2700만원었다. 선수단 평균 연봉은 2400만원 선이었다. 최순호는 팀내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는 선수였지만, 내심 기대했던 3천만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다. 연봉 협상 중에 구단은 더이상 올릴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연봉 3천만원’을 관철하려던 최순호의 주장은 뜻밖에도 쉽게 꺾었다. 한홍기 감독의 연봉이 3천만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정서를 미덕으로 알고 살던 시절이었다. 차마 감독보다 많은 연봉을 고집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역학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연차에 따라 급여가 상승하던 과거에는 오래 뛰는 선수일수록 많은 돈을 벌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최순호처럼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여도 실력이 뛰어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최순호는 이렇게 회상한다.

“천지가 개벽한 거다. 공을 잘 차는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시대가 됐다. 단순히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위계가 완전히 바뀌었다. 팀은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전에는 나보다 10년 더 뛴 선배들이 팀의 중심이었는데, 이후로는 선배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같이 뛰던 선배 중에는 ‘못해먹겠다’며 팀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프로 시대 개막과 함께 톱스타 대우를 받은 최순호는 꾸준히 실력과 스타성을 입증했다. 1984년에는 24경기에 출전해 14골6도움을 기록했다. 경기당 0.83개의 공격포인트를 만들었다. 거의 매 경기 득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플레이를 펼쳤다는 의미다. 1985년 재계약 당시 그의 연봉은 3200만원으로 올랐다. 그해 프로축구 통틀어 최고액이었다. 최순호는 “80년대 중반 압구정 한양아파트가 3천만원 선에서 거래되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최순호가 기억하는 프로 초창기 풍경

재미있는 건 프로라는 외양을 갖추고서도 프로라기엔 미숙한 운영이 많았다는 점이다. 경기 일정도 요즘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최순호의 말에 따르면 “서커스단처럼 전국을 유랑하던 때도 있었다”.

‘OO시리즈’라고 하여 특정 지역에 모든 팀이 모여 주말에 2연전을 펼쳤다. 예를 들어 ‘전주시리즈’라면, 전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에 연달아 수퍼리그가 열렸다. 그다음 주에는 ‘마산시리즈’, 그다음 주에는 ‘대전시리즈’로 진행하는 식이었다. 토요일에 뛰었던 선수가 일요일 경기에 또 투입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경기에 뛴 선수가 다음 경기를 뛰기까지 48시간 이상 쉬어야 한다는 국제적 기준은 그때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권고사항일 뿐이었다. 감독이 뛰라고 하면 그냥 뛰어야 했다.”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모든 팀이 한 장소에 모이다 보니 일요일 경기가 끝나면 수퍼리그가 열린 지역은 선수들의 대대적인 회합 장소가 됐다. 피아 구분 없이 밥을 먹고 술도 한두 잔 나누며 여흥을 즐겼다. 이긴 팀의 선수들이 승리 수당으로 밥값과 술값을 냈다. 요즘같으면 각종 SNS에서 공론화하고 언론에 제보가 이어질 만한 ‘사건’ 아니었을까. 추억을 더듬는 최순호는 그 시절의 정을 그리워하면서도 행정과 운영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프로축구를 알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을 다녔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네축구’랑 뭐가 달랐을까 싶다. 프로 리그 운영 의지만 있었을 뿐 내실이 없었다. 처음부터 연고지 개념을 도입했다면 그렇게 전국을 다니지 않았어도 팀마다 충성도 높은 관중을 확보하고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 거다. 한해 먼저 출범한 프로야구가 시작부터 연고 도시를 정했던 것과 비교된다.”

수퍼리그 초창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풍경은 경품 대잔치다. 1991년 국내 최초 축구전용구장인 포항 스틸야드가 개장하기 전까지, 프로축구가 열린 경기장은 모두 종합운동장이었다. 그라운드와 관중석 사이에는 최대 8미터에 이르는 육상 트랙이 있었다. 이 트랙은 축구경기가 열리는 날 거대한 경품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냉장고, 세탁기, 컬러TV 같은 가전제품을 위시하여 피아노, 경운기, 오토바이, 승용차 등 매력적인 경품이 관중을 유인했다.

종종 선수들에게 내거는 상품도 트랙 위에 올랐다. 프로 100호골, 200호골, 300호골처럼 기념비적인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선수가 이 상품을 차지했다. 최순호의 입단동기이자 ‘절친’인 김경호(전 포항 유소년 총괄)는 프로 300호골의 주인공이 되어 즉석에서 오토바이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이 오토바이가 최순호의 선수 생명을 앗아갈 뻔했다.

“그때 청주에서 주말 2연전이 열렸다. 경기장에서 경호가 오토바이를 받았는데, 당장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청주에 있는 내 본가에 맡겨 놓았다. 경기가 끝나고 본가에서 쉬다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기어 조작법만 배워 오토바이를 끌고 청주고 운동장으로 가봤다. 제대로 탈 줄을 모르니 액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았던 것 같다. 갑자기 오토바이가 ‘부아앙’ 소리를 내면서 하늘로 떴다. 놀라서 공중에 뜬 채로 오토바이에서 몸을 뗐다. 오토바이는 앞으로 나가고 나는 뒤로 떨어지고. 다행히 타박상 정도로 그쳤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

오토바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처분의 대상이었다. 김경호가 서울 이태원에서 현금을 받고 팔았다고 한다.

그의 축구인생을 직조한 두 인물, 박태준과 한홍기

최순호의 축구 인생을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한홍기 감독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두 사람을 회고할 때마다 최순호의 눈동자는 그리움으로 짙어진다. “지금의 내 인생은 그분들이 만들어 주신 것”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두 사람은 포항과 한국 축구사를 다룰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자주 등장한다. 기업인 박태준이 자금력으로 한국 축구판의 틀을 만들고 확장했다면 축구인 한홍기는 선진 기술과 철학을 도입해 그라운드에서 꽃을 피우는 것으로 호응했다. 실업팀 창단부터 프로팀 전환, 전용구장 건립, 스타 영입과 유소년 육성 체계 도입 등 프로축구사에서 큰 발전이 일어난 변곡점에 두 사람이 있다. 둘의 공통 분모는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정이었다. 최순호 개인의 인생에서도 그 영향력이 중첩되는 시기가 있다. 박 회장과 한 감독이 일궈낸 수많은 업적을 벤 다이어그램으로 그리면, ‘스타 확보’와 ‘유망주 육성’이라는 교집합에 최순호가 자리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최순호를 눈여겨본 한 감독의 감식안과 그의 성장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박 회장의 애정이 오늘의 최순호를 만들었다.

“내가 1979년에 포항제철과 계약한 뒤 청소년대표도 되고 국가대표도 됐다. 1980년에 팀으로 복귀해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무척 기뻐하셨다. 그동안 영입했던 선수들은 이미 스타인 사람들이었다. 나를 보는 느낌은 좀 달랐던 것 같다. 병아리같은 선수가 와서 장닭이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봤으니 얼마나 흐뭇하셨을까. 대표팀에 다녀오면 나를 따로 승용차에 태우고 포항 산업단지를 시찰하시곤 했다. 그땐 몰랐는데 좀 더 넓은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한 번씩 한홍기 선생님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셨다. 영문도 모르고 나가면 함께 본사로 가는 거였다. 선생님은 나를 회장께 인사시킨 뒤에 꼭 무슨 결제를 받으셨다. 큰 규모의 예산이 필요하거나 중요한 결제를 받을 때 나를 데리고 가면 회장이 면전에서 거절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만큼 회장님이 나를 아껴 주셨다.”

박태준 회장이 최순호를 두고 축구계에 목소리를 낸 일도 있었다. 1984년 국가대표팀 차출을 거부한 사건이다. 1984년 수퍼리그는 3월 29일에 개막했는데, 최순호와 박경훈 등 포항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대표팀에 선발됐다. LA 올림픽 예선을 준비하는 대표팀 일정과 수퍼리그 일정이 겹친 상태였다. 포항은 팀의 간판 스타들이 프로 무대를 소화하고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대한축구협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 회장은 수퍼리그 개막을 하루 앞두고 포항제철의 불참을 선언했다.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야 할 수퍼리그 전체를 위한 결단이라는 설명이었다. 실행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포항이 하루만에 수퍼리그 보이콧을 철회했다. 장경우 당시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박태준 회장을 만나 “올림픽 예선이 끝난 5월부터는 대표 선수를 수퍼리그에서 뛰게 하겠다”고 약속하면서다. ‘포항스틸러스 40년사’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축구협회는 잘못된 규정과 규약을 고치고 발전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렇게 벼르고 나선 시즌이었지만 1984년 초반 포항의 행보는 불안했다. 개막전부터 7경기 동안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2무5패). 부진이 이어지던 어느날, 한홍기 감독이 최순호를 따로 불렀다. 평소에도 둘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원정 경기를 위해 버스나 비행기를 탈 때면 한홍기 감독은 늘 옆자리에 최순호를 앉혔다. 37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대화가 잘 통했다. 어떤 때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주로 축구 얘기였다. 한홍기 감독은 1970년대부터 영국의 축구잡지 ‘월드 사커’를 구독해 세계 축구의 트렌드를 분석하고 연구한 지도자였다. 그런데 그날의 호출에서 최순호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받았다. 한홍기 감독은 이렇게 물었다.

“자네, 주장을 한번 맡아보면 어떻겠나?”

최순호는 당황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2세였다. 팀에는 서른 살이 넘은 베테랑 선배도 있었다. 감독의 제안은 진지했지만 아직 어린 최순호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그래도 마음은 불편했다. 리그에서 겨우 한 번 승리하면 두세 번 이기지 못하는 흐름이 반복됐다. 반등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최순호가 감독을 찾아가 ‘해보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해 보라. 20대 초반의 선수가 주장을 맡다니 정말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 시절에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나. 주장으로서 훈련하기 전에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오늘 잘해보자’라는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나름의 비법은 말을 짧게 하는 거였다. 말을 길게 하지 않는 대신 내가 한발 더 뛰고 움직였다. 경기장 밖에서도 절제하는 생활을 유지했다.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선배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바뀌니까 성적도 좋아졌다. 후기리그에는 우승에도 근접한 성적이 나왔다.”

그해 최순호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24경기에 14골 6도움. 프로 무대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하고 가장 많은 공격포인트를 기록한 시즌이었다. 최순호가 주장직을 맡은 기간 동안 포항은 우승 1회(1986년), 준우승 2회(1985, 1987년) 등 우승권에서 경쟁했다. 인터넷에는 검정과 빨강이 교차하는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은 최순호가 주장 완장을 차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사진을 소개한 문서가 수없이 많다. 바로 이 시기의 사진이다.

스트라이커 vs 미드필더, 최순호 최적 포지션 논쟁

공교롭게도 최순호의 득점 그래프는 1984년을 정점으로 하향세를 그린다. 1985년 이후 1991년 은퇴하기까지 해마다 2골 이상 넣은 적이 없다. 대표팀 차출 탓에 소속팀에서 활약할 기회가 적었다는 배경을 이해한다고 해도, 한 시절을 풍미한 공격수 치고는 빈약한 기록이다. 물론 숫자는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당시 최순호는 자신의 축구 인생을 건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스트라이커에서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꿨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미드필더로 뛰는 최순호’에 관한 기사들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포지션 변경 시점을 콕 집어 말하긴 어렵다. 프로 개막 시점부터 계속 관심을 갖고 있긴 했다. 한홍기 선생님이 활동 반경을 넓혀보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언젠가 요한 크루이프의 활약상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도 건네 주셨다. 그 영상을 보면서 크게 자극 받았다. 공을 진짜 잘 차더라. 사람이 공을 저렇게 찰 수 있나 싶었다. 처음에는 그 선수의 위치에 대한 인식없이 기술을 따라했다. 크루이프 턴도 시도했는데, 그게 됐다. 기술에 자신감이 생기니까 크루이프의 경기 운영 능력도 눈에 들어왔다. 그걸 흉내 내려고 애썼다. 한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권해주신 덕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최전방에서 공격 2선, 측면까지 움직임에 제한이 없었다. 그때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라고 했는데 요즘의 개념으로 치면 프리롤이었다. 그때부터 골 넣는 것보다 득점 기회를 만드는 플레이에 더 재미를 느꼈다.”

대표팀에서는 또 달랐다. 김정남, 최은택, 박종환 등 대표팀 감독들은 그를 센터포워드로 선발했다. 공격 2선에는 조광래, 박상인, 이영무 등 최순호를 지원해줄 자원들이 즐비했다. 최순호의 말에 따르면 “골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골을 넣을 수 있었다”. 많이 뛰지 않아도 되었다. 볼이 들어올 위치만 정확하게 잡고 있으면 어김없이 골이 터졌다.

“그때 체험적으로 스트라이커는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반경을 줄이는 대신 골을 넣을 때 힘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그렇게 골을 많이 넣었다. 나중에는 좋은 패스를 주던 선배들이 은퇴했다. 나도 골문 앞을 지키기만 하니까 고립되는 느낌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미드필더처럼 움직였다. 직접 좋은 패스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게 더 재밌었다. 크루이프처럼 뛰는 게 잘 안됐다면 나도 포기했겠지. 그런데 잘 되니까 ‘축구도 예술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뛰었다.”

그렇다면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 중 최순호가 더 선호했던 포지션은 어느 쪽일까? 답은 ‘둘 다’이다. 스트라이커는 골맛을 보는 자리라 좋았고, 미드필더는 미드필더대로 재밌는 자리였다. 언젠가 최순호에게 역대 월드컵 대표 선수들을 망라해 ‘베스트 XI’을 짜 보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최전방에 이동국을 세워놓고 좌우 윙어로 각각 김주성과 차범근의 이름을 쓴 그는 자신을 박지성과 함께 공격 2선에 나란히 두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설명했다.

“동국이와 차범근 선배를 이 자리에 둔다면 나는 가운데로 가고 싶다. 종종 내가 계속 스트라이커로 뛰었다면 얼마나 더 득점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긴 한다. 그래도 직접 골을 넣는 것보다 프리로 움직이면서 만들어주는 플레이가 훨씬 재밌었다. 여기서 뛰면 동국이에게 골을 더 많이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 하하.”

필드 위에서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었던 최순호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6년 포항제철의 새로운 사령탑이 된 이회택 감독이 ‘골문 앞에서 골 넣는 데 집중하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감독의 요구와 선수의 갈증이 어긋나면서 갈등이 쌓였다. 1987년에는 감독과 선수 사이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여기에 연봉 삭감이라는 예민한 문제까지 더해졌다. 최순호의 1987년 연봉은 3600만원이었다. 그해 말 포항제철은 1988년 연봉으로 33.3%를 삭감한 2400만원을 제시했다. “1984년을 제외하면 부진한 성적이기에 분발을 촉구하는 뜻”이라는 게 구단의 설명이었다. 최순호는 재계약을 거부했다. 구단은 극약 처방을 썼다. 그를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했다. 최순호도 백기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단락 되는 듯했던 상황은 최순호가 1988년 2월 럭키금성으로 이적하면서 파국(?)에 이르렀다. 표면적으로는 연봉 협상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결과였지만, 사실은 포지션 변경에서 비롯된 감독과의 충돌 그리고 구단과의 갈등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었다.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과 함께 그해 겨울을 뜨겁게 달군 ‘최순호 사태’의 종말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를 각별히 아끼던 박태준 회장과 잠시 소원해졌다. 팀을 떠나면서 회장을 볼 면목이 없던 그는 차라리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이적 후 럭키금성 유니폼을 입고 포항제철을 상대한 첫 경기에 박태준 회장이 등장했다.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스코어 2-1로 포항이 리드하던 막판, 럭키금성이 한 골을 추가했다. 동점골의 시발점이 된 이가 최순호였다. 현장에서 최순호의 활약상과 경기를 지켜본 박 회장은 자신을 보좌하던 측근에게 딱 한 마디를 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왜 스타가 있어야 하는지 알겠어?”

최순호는 럭키금성에서 3년을 보냈다. 1989년 준우승에 이어 1990년 우승으로 정상에 서는 경험을 추가한 뒤 1991년 포항제철로 복귀했다. 언제라고 못박을 수는 없지만 선수 생활의 마무리는 친정팀에서 하고 싶었다.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체력에는 아직 자신이 있었지만 점점 뛰는 시간이 줄었다. 그래도 프로 통산 100경기는 채우고 싶었다. ‘100’이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점에서도 마침표를 찍기에 적당했다. 서두에 소개한 1991년의 여름 밤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을 떠올리는 최순호의 얼굴에 잔잔히 미소가 번졌다.

“글쎄…… 마지막 경기라고 하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정식으로 은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최순호는 1991~1992시즌 프랑스 2부리그 로데스AF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며 지도자 수업을 병행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포항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포항(2000~2004, 2016~2019)과 현대미포조선(2006~2008), 강원FC(2008~2011)에서 감독으로 일했다. FC서울 미래기획단 단장(2012~2013), 포항 유스 총괄 기술이사(2019~2022)를 거쳐 2023년 현재 수원FC 단장을 맡고 있다. 필드 위에서 크루이프를 닮고 싶었던 최순호는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 오늘도 K리그에서는 ‘끝나지 않은’ 그의 축구가 이어지고 있다.

배진경(온사이드 편집장)

전설을 말하다 레전드 K - 최순호편
(스카이스포츠 / 2023년 8월 4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