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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PARK Tae-Joon

2023년 5월 2일 K리그 출범 40주년을 기념하는 명예의 전당 헌액식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1세대 최순호, 2세대 홍명보, 3세대 신태용, 4세대 이동국 등 지난 40년의 10년씩을 대표하는 선수에 대한 헌액과 지도자 부문에 김정남 감독을 모시는 시간이 지난 뒤 이제 행사는 마지막 한 명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윽고 50대 장년의 한 신사가 무대 위에 올랐다. 그는 아주 침착하고 담대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이렇게 추억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구 참 좋아하셨습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러셨지만, 선친께서도 치열했던 개발시대에, 미래 세대를 위해 희생하시는 마음으로, 서울의 집보다 멀리 포항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 계시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유년기에, 그래도 반짝거리는 추억이 바로 축구였습니다. 방학을 이용해 포항에 가면 퇴근길에 군화 신은 그대로, 저랑 공을 차 주시고, 짬을 내어 서울에 오시는 길에 동대문운동장에 같이 가고, 말년에 손주를 데리고 독일 월드컵까지, 저와 저희 가족에게 생생하고 소중하게 평생을 간직할 특별한 기억을 축구가 만들어 주었습니다. 월드컵, 올림픽에서 국위 선양하는 축구도 중요하지만, 한 가족이 같이 공을 차고, 같이 응원하고, 세대와 성별을 초월해 끈끈하게 공감하는(중략) 오늘도 어김없이 들판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공을 차고 뛰어놀고 있으며, 그들과 어우러져 그 가족 친지들은 작지만 큰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들은 주말이 되면 지역 프로팀의 유니폼을 찾아 입고 전용구장으로 향합니다. 오늘의 이 모습이, 저의 선친께서 생각하시던 프로축구 미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프로축구의 진보가 우리의 일상에 더 가깝게 자리잡고, 스포츠가 주는 가치를 선도적으로 일깨워 주는 미래를 기대합니다.(후략)”

이 헌사를 보낸 이는 청암(靑巖) 박태준 POSCO 명예회장(이하 회장으로 칭함)의 아들 박성빈 씨였다. 장남을 통해 전해진 거인의 생각과 뜻은 장내에 큰 울림을 주었다. 국위선양으로의 축구보다는 우리네 생활에 녹아서 삶의 가치를 더해주는 의미로의 프로축구를 더 상상해 본다는 헌사는 K리그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번 헌액식의 하이라이트는 감히 이 헌사에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K리그가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선각자들을 기리는 이유도 이런 가치와 유산을 다시한번 음미하고 헌양하는 것에 있다고 믿고 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거인, 축구도 일으켜 세우다

박태준 회장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졸업해 1963년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인의 삶을 살았다. 그가 축구와 직접 인연을 맺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64년 국영기업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다. 대한중석은 한국전력, 석탄공사 등과 함께 당시 몇 개밖에 없던 실업 축구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선수들의 처우는 형편없었고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1950년대부터 이어져오던 이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이가 박 회장이었다.

‘박태준은 어느 날 광산 현장에서 낯익은 광부들을 발견했다. 축구 국가대표선수 함흥철, 김정석, 조윤옥 등이었다. 국가대표 감독 한홍기의 얼굴도 보였다. 사정을 알아봤다. 축구단 운영에 연간 1억 원쯤 소요되어 평소엔 광부로 부려먹다가 시합이 다가오면 합숙훈련을 시키는데, 대우도 형편없다고 했다. 선수들에게 당장 보따리 챙겨 서울로 올라가라고 지시해놓고, 대한중석 축구팀을 제대로 육성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호령했다. 곡괭이 짊어진 축구선수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번듯한 실업축구단 하나를 탄생시키는 일대 사건으로 발전된 것이다. 박태준은 축구를 좋아했다. 온국민이 즐기는 국기(國技)인데다, 곤궁함에 빠진 한국이 축구로는 번번이 일본을 이겼기 때문이다. 대한중석 축구단은 뒷날 포스코 축구단 창단의 주축을 이루게 된다.’ (이대환 저,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p.206~207에서 인용)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오랜 준비를 거쳐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를 공식적으로 창립한 뒤 ‘산업의 피’라 불리는 철을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임무를 완수해냈다. 포항제철에서 축구단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1972년 여름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한중석 축구팀이 그해 1월에 해체됐는데, 대한중석에서 포항제철 사장으로 이미 자리를 옮겼던 박태준은 새로운 축구팀 창단을 구상하고 있었다. 대한중석 출신 한흥기 감독을 비롯한 핵심 선수들이 이 신생팀의 주축이 됐다. 그해 7,8월경 10명도 안되는 소수 인원으로 성균관대 인근 장생여관에서 합숙 훈련에 들어간 것이 포철 축구단의 시작이었다. 1973년 4월 1일 공식 창단한 포항제철은 이듬해인 1974년 제22회 대통령배 쟁탈 전국축구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단숨에 실업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혹자는 “포항제철은 창립 초창기 모든 기술을 일본에게 배웠는데, 박태준 회장이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당시로는 유일하게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수단인 축구단을 만들어 활용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통찰력 깊은 그가 단순히 일본의 콧대를 꺾기 위해서 축구를 이용한 것은 아닐 터이다. 송의달 조선일보 에디터는 2023년 1월 15일자 신문에 실린 글에서 ‘청암은 “일본을 알고 일본을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의 3단계 일본 대응을 주창했다. 청암은 포항제철의 스승이었던 신일본제철을 1990년대 추월해 그 타당성을 증명해 냈다’고 썼다.

워낙 카리스마가 넘쳤던 그는 기업인이기 이전에 군인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로 이어지는 고도 경제성장기를 그는 ‘돌격 앞으로’의 군인 정신으로 돌파해냈다. 박태준 회장을 담은 사진 가운데 1975년 8월 포항제철 실업축구단이 신일본제철 축구팀을 초청해 가진 친선 경기의 시축 장면이 꽤나 유명하다. 이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축구공을 힘차게 차는 그의 발에는 구두나 운동화가 아닌 군용 워커가 착용되어 있다.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으로 평생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왔던 그는 제철소를 만들 때도 최전선의 사령관을 자임했다. 허허벌판의 모래투성이 영일만에 세워졌던 60평짜리 2층 목조건물의 현장 지휘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영웅 롬멜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와 비슷하다고 해서 ‘롬멜 하우스’라 불렸다. 그는 공기 단축을 위해 하루 24시간 작업을 지시해 놓고 스스로도 현장에서 매일 서너시간밖에 못자면서 고락을 함께했다. 삼성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은 17년의 나이 차이에도 청암이라는 호를 지어줄 정도로 깊은 우정을 나눴는데 그는 박태준 회장을 일러 “군인의 기(氣)와 기업인의 혼(魂)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다. 어쩌면 사진속 군용 워커나 ‘롬멜 하우스’는 그런 기를 상징하는지도 모르겠다.

축구단 창단 멤버인 안기헌 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지금도 1973년 7월 3일 포철 1기 설비 종합준공식 때를 회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박태준 회장이 준공식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앞으로 포철은 중화학공업의 핵심적 위치를 점하며, 보다 비약적인 국가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으로 확신합니다”라고 보고하던 그 순간에 실업축구 초년생 안기헌도 창단 멤버들과 함께 행사장에 도열해 있었다. 그는 “회장님께서 그 엄청난 행사에 축구 선수들을 참여시킨 뜻은 과연 무엇일까라고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도 ‘정말 대단하다, 축구단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구나’라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축구단의 가치가 기업에도 좋은 영향을 준다는 철학을 가지신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포항제철과 신일본제철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양국을 오가면서 총 12번의 친선 경기를 치렀다. 상대 전적은 포철이 10승1무1패로 우세했다. 안기헌의 회고는 계속된다. “초창기에 신일본제철에게 기술도 배우고, 투자도 받았다. 두 회사 사이에 축구를 통해 친선을 다지니 자연스럽게 기술교류나 인적교류도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회장님의 뜻대로였다. 축구 실력은 조금 앞섰으니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사원들에게 대리만족이 되고. 사기가 오르는 측면도 있었다. 국제 경기가 귀할 때였으니 일반 팬들의 관심도 많았는데, 축구로 일본을 이기는 기쁨을 국민들에게 드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족보없는 축구는 가라!”, K리그 최고(最古)의 명문을 만들다

한홍기 감독의 존재는 박 회장의 축구 인생을 논할 때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서 평천하(平天下)를 위한 대계를 논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한 감독은 1972년 아마추어 포항제철 축구팀의 창단 사령탑으로 선임된 것을 시작으로 팀이 프로로 전향했을 때도 계속 지휘봉을 잡았고 이후 1993년 명예 퇴직할 때까지 21년 동안 감독, 부단장, 총감독, 고문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박태준의 꿈’을 단단하게 현실로 만들었다. 팀 창단은 물론 인재영입과 육성, 축구전용구장 건립 등 수많은 일들이 두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진행됐다. 박 회장은 경영에서도 빼어난 전문가에게 전권을 맡겼고, 그의 신뢰속에 현장에서는 성과를 냈다. 이러한 선순환이야말로 박태준 리더십의 요체를 보여준다. 창단 멤버인 황종현 전 단장은 POSCO 뉴스룸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서 수어지교(水魚之交)와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박태준 회장님이 안 계셨으면 오늘의 포스코가 있을 수 없고, 한홍기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포스코가 오늘과 같은 명문 축구단을 보유할 수 없을 것이다. 포스코가 회사 창립과 함께 축구단을 창단한 것도 사실 박태준 회장님과 한홍기 선생님 사이의 교감으로 이뤄진 일이다. 또 박태준 회장님께서는 한홍기 선생님을 체육계 인사로만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느꼈다.’

당대 최고 스타지만 유독 개성이 강해 축구계에서 여러 가지 분란을 많이 일으켰던 ‘풍운아’ 이회택도 한홍기 감독의 권유로 포철에서 둥지를 잡았고, 이후 선수와 지도자로 일가를 이뤄내게 됐다. 이 또한 박태준 회장의 배려였고 계획이었다. 이회택의 회고를 들어보자.

‘1972년 한양대 3학년 2학기, 당시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기도 한 한홍기 선생이 만남을 청했다. 박태준 회장의 명(命)이라고 했다. “1973년에 포철 축구단이 창단된다. 초대 감독으로 발령이 났다. 박태준 회장이 지명했으니 포철에 입단하라”는 전갈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1980년 은퇴할 때까지 포철 유니폼을 입었다. (포철 감독이던)1988년 시즌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개막을 앞두고 박태준 회장이 “이 감독, 집 없지? 우승하면 집 사준다”고 했다. 이런저런 관리 소홀로 집을 날리고, 그때까지 한양대의 배려로 학교 관사에서 지내던 사정을 알고 한 약속이었다. 우승한 뒤 받은 포상금은 1억200만원. 서울 송파의 아파트를 사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월간조선, 2021년 6월호에서 인용)

2011년 5월 15일 포항 스틸야드에는 정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박태준 회장이었다. 이날 1만6천여명의 홈팬은 따뜻한 박수와 큰 연호로 클럽의 창립자를 환영했고, 평소 즐겨쓰던 중절모 차림의 그는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가 찾은 스틸야드는 1988년 말 착공해 1990년 11월 완공된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이었다. 넓은 육상트랙을 끼고 있는 종합운동장에 익숙했던 축구 팬에게 스틸야드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2만242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곳은 관중석과 그라운드의 거리가 단 6m에 불과했다. 피치를 달리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마저 느낄 수 있는 경험은 한동안 여기에서만 가능했다. 2002 월드컵 개최지 결정을 위한 국제축구연맹(FIFA) 실사단이 199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전용구장은 오직 이 곳뿐이었다. 스틸야드는 월드컵 유치에 보이지 않은 공헌을 했다. ‘축구 전용구장 하나없는 나라에서 무슨 월드컵을 여느냐’는 세계 여론의 힐난에서 간신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제철소를 세웠듯이 축구발전을 위해서 전용구장을 만들었던 박태준 회장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아직 개장 전의 스틸야드 그라운드에서 잡초를 뽑으면서 잔디를 고르는 한 장의 사진은 축구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진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데 공교롭게도 스틸야드 개장 이후 그는 이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둘러싼 정치적인 격랑속에 빠져들면서 그후 오랜 기간 계획하지 않았던 말년을 보내게 됐기 때문이다. 포항 축구단을 만들었고, 스틸야드를 건립했던 그가 이 곳에서 경기를 직접 관전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됐다. 스틸야드 방문 이후 불과 7개월여뒤인 그해 12월 13일 오후 5시20분경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84년 2개월 보름여에 걸친 거대한 인생을 마무리했다.

청암이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2013년 5월 23일 포항 스틸러스는 창단 40주년을 기념해 K리그 구단으로는 처음으로 자체적인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13명을 헌액했다. K리그 최고(最古) 클럽만이 시도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행사였다. 한홍기 창단 사령탑을 비롯해서 이회택 최순호 박경훈 라데 황선홍 홍명보 박태하 김기동 같은 빛나는 이름을 뒤로 거느리고 가장 먼저 1호로 헌액된 이는 당연히 박태준 회장이었다. 구단은 또 창단 구단주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스틸야드 동쪽 지역(E석)을 ‘청암존’으로 부르는 명명식도 함께 가졌다. 국내에서 프로스포츠 구단주가 팬들과 지역 사회에서 이처럼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K리그의 ‘최초’들을 만든 사나이

청암이 세상을 떠난지 만 10년이 지난 올해는 포항 스틸러스 창단 50주년이자 한국프로축구 출범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은 1부와 2부를 합쳐서 25개 팀을 보유한 아시아 정상급의 K리그는 1983년에 불과 두 개의 프로팀(할렐루야, 유공)과 세 개의 아마추어팀(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이 참여했던 ‘수퍼리그’를 자신의 역사적 기원으로 삼고 있다. 포철은 1982년 실업축구 코리안리그의 챔피언으로 수퍼리그 참가 자격을 얻었다. 원년 시즌 도중 소속 선수들 신분을 계약직으로 바꾸는 등 준비를 착착 진행한 끝에 1984년 2월 프로로 전환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리그 40주년을 기념해 ‘K리그 명예의 전당’을 처음으로 신설하고 역사적인 첫 헌액자를 결정했다. 헌액자는 선수, 지도자, 공헌자 부문으로 세분됐다. 필자는 ‘K리그 명예의 전당 선정위원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모든 회의를 주재하면서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2023년 2월 6일에 열린 선정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는 공헌자 부문의 첫 헌액자로 박태준 회장을 만장일치로 선정했다. 한국프로축구에 남긴 선각자로서의 업적에 대해서 모든 선정위원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그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프로축구의 ‘최초’들을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한 것만 시간대별로 정리한다면 ▲1980년 최초의 산학협동 유소년축구 자매결연 ▲1983년 최초의 외국인 선수 영입 ▲1988년 최초로 초중고 연령대별 축구팀 구축 완료 ▲1990년 최초의 축구전용구장 건립 ▲2000년 최초의 클럽하우스 건립 ▲2003년 최초로 성인 프로팀과 연계된 유소년 육성 시스템 완성 등을 들 수 있다.

박태준 회장이 한국프로축구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도 넓고 깊어서 비단 포항 한 구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시되지만, 그는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가장 먼저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시켰다. 그 가운데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업적이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다. 포항이 2003년에 완성한 이 시스템은 이후 K리그의 전범이 됐다. 포항이 먼저 구축한 이후 울산, 전남 등 다른 구단들이 벤치마킹하면서 리그에 널리 펴져나갔다. 이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008년부터 모든 구단에 유소년 시스템을 의무화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여전히 한국축구의 기초를 다지고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대역사(大役事)가 박태준 회장의 결단에 의해서 비롯됐다.

포항은 아마추어 실업축구 시절부터 산학협력을 통해서 유소년 축구에 일찌감치 관심을 가졌다. 1980년 9월 2일 박태준 회장은 10개 시도의 10개 고교와 1개 대학, 경상북도내 초중고교 4개 학교 등 총 15개팀 관계자와 만나 자매결연을 맺었다. 이들 팀에게 당시로는 파격적인 훈련비와 용품이 지원됐다. 이후 1984년 포항제철 중학교를 시작으로 1985년 포항제철 공업고등학교, 1988년 포항제철 동초등학교에 연이어 팀이 만들어지면서 국내 최초로 연령별대 축구팀이 구비됐다. 이동국 신화용 황진성 오범석 박원재 이명주 신진호 신광훈 김대호 고무열 등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인재들이 화수분처럼 배출됐다. 2003년에는 포스코교육재단 산하 초중고 축구부가 포항 스틸러스 클럽 소속으로 전환되면서 국내 프로축구 사상 최초로 성인 프로팀과 연계되는 장기적인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완성됐다.

포항의 레전드이자 유럽 유학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유소년 시스템 도입을 처음으로 주장했던 최순호 수원FC 단장은 박태준 회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증언한다.

‘현역 은퇴뒤 프랑스로 유학을 갔는데, 잠시 귀국해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면 “거기는 어떻더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예,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우리도 그렇게 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항상 모든 문제를 시스템적으로 고민하셨기에 (선진 축구계의)이런 상황을 바로 이해하셨던 거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돌아와서 포항에서 유스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자 초중고 현장 지도자의 반발이 거셌다. 지금까지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하는게 편하고 이득도 있었는데, 클럽 산하로 들어오는 거를 불편하게 여겼다. 2002년 말까지 현장의 반발이 워낙 커서 내가 상황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교육재단 산하 초중고 팀은 서로 따로 놀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고심 끝에 회장님께 SOS를 쳤다. 그리고 해결이 됐다. 회장님이 (상황을)정리정돈해 주신 거였다. 2003년부터 국내 최초로 포항에서 유소년 시스템이 도입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회장님 덕분이었다.’

최초의 외국인 선수 영입과 최초의 클럽하우스 건립도 박 회장이 아래로부터의 건의를 곧바로 수용했기에 가능했다. 포철은 수퍼리그 원년인 1983년에 원료공급사인 브라질 CVRD사와 맺은 스포츠교류 협정에 따라 세르지오와 호세 등 2명의 선수를 임대했다. 비록 별다른 활약을 못하고 6개월만에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이후 국내 구단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빼어난 외국인 선수들을 영입하는 계기가 됐다. 2000년 3월 착공해 2001년 1월 완공한 클럽하우스는 천연잔디구장 2면, 인조잔디구장 1면, 44개에 이르는 1인1실, 웨이트 트레이닝장, 야간훈련이 가능한 조명탑 등 최신 설비를 자랑했다. 당시 80억원의 공사비가 들어갔는데 2002 월드컵을 대비해 대한축구협회 주도로 파주에 만들었던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NFC)의 초창기 공사비가 90억원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클럽 수준으로 엄청난 규모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인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박태준 회장의 경영철학은 축구단 운영에도 고스란히 투영됐다. 인재 중시는 스포츠 분야에서는 자연스럽게 스타 중시로 이어졌다. 박 회장 시절에는 당대 최고 스타라면 항상 포항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계보 가운데 이회택~최순호~황선홍~이동국 등 포항 출신이 유독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박 회장의 인재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신예로 떠오른 홍명보와 황선홍의 스카우트 파동이었다. 두 선수를 한국축구의 미래로 점찍은 박 회장은 구단에 ‘스카우트 특명’을 내렸다. 당시는 신인 드래프트제도가 시행중이어서 두 선수를 모두 포항으로 데려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구단은 제도와 규정의 맹점을 파고들었고, 다른 5개 구단은 포항의 저돌적인 스카우트 행보에 반발하며 갈등을 빚었다. 결국 포항은 상무에서 제대한 홍명보를 1992년 유공과 1대3 트레이드로 입단시켰고 1993년에는 황선홍을 신생팀 완산 푸마와 전무후무한 1대8 트레이드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두 선수는 2002 월드컵 4강 주역이 되는 등 선수와 지도자로 지난 30여년간 한국축구를 변함없이 이끌고 있다. 인재를 알아보는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안목을 잘 보여준다.

박태준 회장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선수 가운데 한명인 최순호는 매우 흥미로운 가정을 내놓았다.

“만일 회장님이 ‘정치적 유랑기(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이후의 상황을 뜻함)’가 없었다면, 그래서 포철을 조금 더 연속성을 갖고 경영할 수 있었다면, 포항 축구단은 K리그를 얼마나 많이 바꿔놓았을까하는 상상을 가끔 한다. 포항이 2003년 유소년 시스템을 먼저 도입하니 5년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이 제도를 리그 차원에서 의무화했다. 그런데 박 회장님의 경영 단절기가 없었다면 포항에서 유소년 시스템을 도입하는 시기가 휠씬 앞당겨졌을 거다. 자연스럽게 다른 구단과 프로연맹이 좇아오는 시기도 더 빨라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마 규모와 내용면에서 한국 프로축구는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다. 박태준 회장이 더 건재했더라면 포항 구단이, K리그가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흥미롭다. 하지만 그보다는 역사의 교훈을 통해 미래의 가치와 비전을 창출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더 기억하고,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오롯이 당대 축구인들의 몫이다.

위원석(K리그 명예의 전당 선정위원회 위원장)

※이 글은 포항 구단 50주년 기념 책자 ‘THE 50’에 기고한 것을 대폭 보완하고 수정했음을 밝힙니다.